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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61)제85화 나의 친구 김영주(46)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한성수 열사>
1944년10월 홀연히 중경에 나타난 정항범은 돈을 물쓰듯했다. 전시 하에 누구나 다 어려웠던 중경 교포사회에서 그는 단연 돋보였다. 억대로 치부한 손창식이 자기 구명운동을 하는데 왜 돈을 아꼈겠는가. 정항범은 독립운동 성금 10만 달러 외에도 별도로 받은 여비와 공작금이 두둑했으리라는 것이 당시 중경에 있는 인사들의 중론이었다.
그는 어떤 경로를 밟았는지 모르나 임시정부 외무부차장으로 임명되었다. 노정객들이 태반인 임정에서 그는 외무부차관이 된 것이다(당시 외무부장은 조소앙).
그러던 중 정항범은 해방이 된 45년 9월 어느 날 홀연히 중경에서 행방불명되었다. 엄항섭 국무위원이 상해와 남경에 간다는 직후에 증발되었으니 그는 손창식에게 받아온 10만 달러를 김구선생에게 전하지 않은 것이 탄로 날까봐 그랬다는 것이다.
이듬해 해방이 되고 임정요인들은 상해로 갔다. 상해 홍구 공원에서는 김구선생 일행의 환영식 준비가 한창이었다. 그런데 행방불명된 정항범이 환영식장 단상에 앉아있는 것이 아닌가.
그가 독립자금 횡령범이라는 것을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이 때 정항범의 중경행적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임정 경호처장 윤경빈이 『당신, 여기 왜 왔어. 여기가 어떤 자린 줄 알고 앉아 있는 거야』 하며 끌어내리려고 하자 정항범은 식장의 혼잡을 틈타 줄행랑을 치고 만 것이다.
홀거홀래, 그는 얼마 후 북지청도에 나타났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공부했다는 그는 유창한 영어로 미군과 어떤 교섭을 했는지 미국 구축함을 타고 인천에 갔던 것이다. 그후 정항범은 임정 외무부차장이라고 자기를 소개하고 다녔으니 해방된 고국 땅에서 얼마나 존경받았겠는가.
그는 미리부터 알고 지냈던 이훈구 당시 농림장관의 추천으로 신한공사(옛 동양척식) 총재가 되었고 총재 재임 중 한국에서는 가장 큰 다이아몬드 반지를 사들였다. 그 반지가 누구에게 갔는지는 그 당시 유명한 이야기다.
그는 프란체스카 여사의 각별한 사랑을 받으면서 주일 대표부 대사를 지냈다. 공주 영명중학 조병옥 박사의 3년 후배인 그는 독신주의자로서 결혼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중경시절 성도에서 개업을 하고있던 한국인 의사의 부인 김 모 여사와의 관계로 의사 댁에 가정파탄을 일으킨 그였다.
이야기를 다시 상해반점으로 돌리자. 이철 선생이 이번에는 엄숙한 어조로 선언하듯이 말했다. 『동지들이 고국에 돌아가거든 한성수 열사의 강렬한 순국을 꼭 전해야 합니다.
이철 선생에 따르면 한성수는 신의주 출신으로 동경 전수대학에 다니다 학병으로 끌려나와 탈출, 광복군 공작원으로 상해에 잠입했다. 그는 이상일이라는 별명을 쓰고 있었으며 보조대원과 함께 군자금 지원공작을 하기 위해 손창식을 찾아갔다. 손창식과 만난 후 황급히 뛰어나온 그는 「실패다. 빨리 뛰자」면서 밖에서 망을 보고 있던 보조공작원 김영진(당시 17세, 현 광복회 부산·제주 연합지부장)을 재촉했던 것이다(김영진씨 증언).
한성수는 계속 교포포섭사업(광복군으로 데리고 가는 공작)을 하던 중 일본 밀정(손창식과 동향이며 끄나풀로 알려짐)인 김사회(창씨=옥천?)의 밀고로 일본헌병대의 급습을 받고 체포된 것이다. 1945년 3월13일의 일이었다.
그는 기동할 수 없을 만큼 심한 고문을 당하고 업혀 군법재판장에 나왔다.
일본말 쓰기를 완강히 거부했기 때문에 통역을 세우고서야 재판이 속개됐다.
재판장이 『너는 일본에서 대학을 다닌 자인데 왜 국어(일본말)를 쓰지 않는가』라고 묻자 『나의 국어는 오직 조선어뿐이다』라며 일본말 쓰기를 거부했다.
『너는 일본의 승리를 믿고 있는가』 『대답하마. 일본은 기필코 패전하고야 만다. 그때 가서 너희들은 우리 조선독립군들이 무수히 희생당한 것과 같은 고초를 당하고야 말 것이다.』 『관대히 봐 줄 터이니 마음을 고쳐먹어라』 『어리석은 수작 마라. 너희들이 일본에 충성하려고 애쓰는 이상으로 나는 나의 조국을 위해 충성할 것이다.』
그는 당당히 그렇게 소리 높였던 것이다.
당시 한성수의 나이 25세. 45년5월 남경형무소에서 잔인무도한 놈들의 칼날에 참수 당했다.
흥분 반, 눈물 반으로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 이철 선생은 「유해나마 고국에 모셔야 했는데 그도 못하게 된 것은 살아남은 우리들의 성의부족 때문이었다」며 크게 한탄했다.
이때 김영주가 이 선생을 위로하며 이렇게 말했다.
『지금 만주에는 이름도 알 수 없는 무수한 독립전사들의 넋이 방황하고 있습니다. 외람된 말씀이나 나는 여지껏 임정이나 광복군의 활동을 우습게 봐왔습니다. 그러나 지금 선생님 말씀을 듣고 보니 한성수 동지야말로 임정이나 광복군의 면목을 혼자서 완전히 살린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한 김영주는 돌아서서 눈물을 닦았다. 그는 1934년 만주 노흑산에서 17세로 죽은 작은형 철주도 전사한 것이 아니라 실은 참수 당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여간해서 눈물이나 감상적이 아니었는데 그날 밤 처음으로 그가 우는 것을 보았다.
김영주를 울렸던 한성수열사의 유해는 도대체 어디로 행방불명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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