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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세 실향민 홍송식 옹|"통일 염원" 수상록 여덟권 펴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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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오래된 나무 가운데도 더욱 넓은 그림자를 드리우는 고목이 있다.
넉넉한 품새의 가지에는 새들이 날아와 둥지를 틀고 햇살이 따가운 날 먼 여정에 지친 나그네가 땅을 홈치며 쉬어가기도 한다.
80고개를 훨씬 넘긴 실향민. 홍송식 옹 (84)이 최근 펴낸 수상록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읽는 이에게 문득 인생을 되돌아보게 한다.
뛰어난 학자나 걸인이나 크세 재산을 일으킨 기업인이 아니지만 유난히도 파란만장한 우리의 근세사를 몸으로 겪어낸 홍옹의 고목같은 체취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리라.
소학교 4학년 중퇴가 학력의 전부인 홍옹이 펴낸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자신의 오랜 경륜을 바탕으로 이 땅에 사는 모든 이들에게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마땅한가를 제시해주는 일종의 경세서.
74세 되던 해인 82년 자신의 회고록 『가시밭길을 헤치고』를 출간한 뒤 지금까지 펴낸 여덟번째 책이다. 거의 1년에 1권 꼴로 책을 내고 있는 셈이다.
78세 때 『사색의 이삭』이란 첫 수상록을 펴낸데 이어 『역사 앞에서』 (80세) 『어느 노인의 목소리』 (81세) 『창 밖을 바라보며』 (82세)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82세) 『통일의 그날까지』 (83세) 등 여든 줄에 들어서 만도 여섯권의 수상록을 펴내 노익장을 과시했다.
8권 책의 주제는 대부분 민족의 숙원인 남북 통일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방향 제시다.
『특별히 배운 것이나 이룩해놓은 것도 없는 내가 자꾸 된소리 안 된소리 써댄다고 늙은이 망령이라고 할지 몰라. 하지만 할 소리는 하고 죽어야지. 이북에 가족을 둔 실향민이라고 통일을 말하는게 아냐. 수천년 동안 조상들이 지켜온 이 강토를 동강이 내놓은 죄인의 입장에서 더 이상 굳어지기 전에 원상태로 회복시켜 민족의 정기를 살리자는 것뿐이지.』
홍 옹은 책마다 근로자·학생·시민·국회의원·법조인·정치인·대통령에 이르기까지 「통일을 위해 해야 할 도리」들을 일일이 짚어놓았다. 김일성과 이북 동포들에 내한 부탁과 당부도 빼놓지 않았다.
『나와 김일성은 고향이 마을 이웃지간인데다 내가 5년 연상이야. 연령차가 있고 학교가 달라 직접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내 친구 중에 그를 잘 아는 사람이 많아. 친구라면 친구 사이인 셈이지. 얼마전 신문에서 김일성이가 계단을 부축 받아 내려오는 모습을 보니 남의 일 같지 않았어. 죽음을 눈앞에 둔 이 홍모가 김일성과 70여년전 어린 시절로 돌아가 순수한 마음으로 대화를, 나누고 싶어. 모든 욕심 버리고 하나의 민족으로 오순도순 살자고 말이야.』
홍옹이 강조하는 또 다른 주제는 올바른 인간 교육.
홍옹은 「살아있는 정신」을 강조하면서 참다운 인간 교육의 필요성과 실시방법 등에 대부분의 지면을 할애했다.
『요즈음 사회가 혼탁해진 것은 어른들인 기성세대 잘못이야. 황금만능주의에 절어 한탕하려는 아버지와 부동산 투기에 눈이 먼 어머니 사이에서 자라나 국민학교에 들어가면 선생님으로부터 돈 봉투 가져오라는 것부터 배우고 중·고등학교에서는 입시만을 위해 줄달음치고…. 이렇게 자란 사람들이 뭐가 옳고 그른지 알겠어.』
홍옹은 바른 교육과 정신의 확립만이 통일에 이를 수 있은 가장 확실하고도 빠른 첩경이라고 확신한다.
홍옹은 19세기중반 프러시아와 오스트리 아연합군에게 크게 패해 멸망 직전에 빠진 덴마크를 구해낸 애국 교사 그룬트비그의 예를 들면서 교육개혁이란 우선 자기 자식만을 위한 사랑의 30%만이라도 남의 자식에게 나눠주는데서부터 시작된다고 주장한다.
이렇듯 젊은이 못지 않은 열정으로 책을 퍼낸 홍옹은 80년대초 사회의 난맥상을 보며 인생의 땅거미가 드리워지는 자신이 그저 늙은이로 자처하고 들어앉아서는 안 된다, 도움되는 말들을 전하자는 욕망을 주체할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이같은 할아버지의 소망은 이대국문학과를 졸업한 손녀딸 은정씨 (25·미국 샌프란시스코거주)와 의기투합했다.
원고는 홍옹이 구술한 것을 은정씨가 정리한 뒤 고향 친구인 전 경남대부총장 윤세 긍박사 (경제학)가 감수해 출판사에 넘겼다.
작업 시간은 하루에 30분∼한시간, 길 때는 서너 시간씩으로 책 한권을 탈고하는데 6개월 정도가 걸렸다
흥사단 회원으로 각종 명사 강연회에는 빠짐없이 참석하는 홍 옹은 회고록을 출간한 뒤부터는 신문이나 강연회에서 소재를 구한 다음 역사책 등 자료를 구했다.
1천∼1천5백권 정도 비매품으로 출간하면 학교 도서관과 관공서·국회의원 등에게 우송한다.
출판 비용은 인쇄비 1천만원, 우송료 2백만원 정도로 사재로 충당한다.
「괴짜」홍옹의 인생편력은 수십권의 책을 펴낼 수 있은 소재가 되고도 남음직하다.
홍옹은 경술국치를 당하기 3년 전인 1907년 김일성의 출생지와 대동강을 사이에 두고 평남 대동군 대동강면 조왕리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다섯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누이와 함께 평양시 외성인 유성리에 살면서 열두살 되던 해 삼일 운동을 겪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13세 되던 해 광성 소학교 4학년을 중퇴하고 철공소 견습공으로 들어가 17세 때 홀어머니마저 돌아가시자 단신으로 도일, 대판의 추산 기계 제작소에 들어가 우리 나라 엔지니어의 신구자가 됐다.
4년만인 22세에 귀국, 평양 병기 제작소에 1급 기술자로 취직했던 홍옹은 「만주 사변」이 터지면서 중국으로 건너가 온갖 고생속에 나라 없는 설움을 겪었다.
해방 후 한때 목화씨 기름 공장을 경영하기도 했던 홍옹은 1·4후퇴 직전 아들과 사위·조카 등과 함께 미군함정으로 피난한 것이 잘못돼 포로 아닌 포로로 부산 가야·거제도·마산 수용소를 옮겨다니며 수용소 생활을 해야 했다. 사제 수용소에서 「빨갱이」들의 난동으로 사위를 잃었고 반공 포로 석방시 아들과 함께 탈출했다가 다시 잡혀 54년1월21일 포로 교환 때 간신히 풀려났다.
54년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당인리 화력발전소 건설 기술자로 참여하면서 황해도 출신 부인 (74)과 결혼, 정년 때까지 직장 생활을 했다.
62년 55세로 정년 퇴직 후 동대문시장에서 양복지 도매상을 경영하기도 했고 못 배운 한을 풀고 기술자 양성을 위해 매년 경남대에 장학금 1천만원을 기탁하고 그해부터 매년 마산공고생 20명에게 20만원씩 4백만원의 장학금을 주는 등 여생을 후진 양성에 바치고 있다.
피난 당시 5년 연하의 부인과 작은 아들, 시집간 말과 외손녀 2명 등 다섯 식구를 북에 두고온 홍옹은 현재 서초 기업을 운영하는 장남 승덕씨 (58) 내외와 2남 1녀인 손자·손녀, 서울서 결혼 후 얻어 시집보낸 딸 (34) 내외 및 외손녀 (5) 등 일가를 이뤄 살고 있다.
젊은 시절 육상과 야구·축구 등으로 단련돼 아직도 건강만은 자신한다는 홍옹은 오늘도 서울 역삼동 827의15 자택방에 걸려 있는 평양의 옛 지도를 더듬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이만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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