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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해고…줄도산…한보 부도에 무너진 당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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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1997년 그때는

1997년 1월 23일, 서해안 당진에 제철소를 짓던 한보철강이 쓰러졌다. 단순한 부도가 아니었다. 정경유착의 썩은 냄새가 진동했다. 이어 현직 대통령의 아들이 구속되면서 대통령의 리더십은 급속도로 마비됐다. 정치권은 대통령선거에만 몰두했다. 경제도 어려웠지만 더욱 심각했던 건 경제를 챙길 리더십의 실종이었다. 사회는 혼란에 빠졌다. 위기를 느낀 외국 자본은 앞다퉈 한국을 빠져나갔다.

해고 후 창업 성공한 강성진씨

첫 매출 36만원
지금은 30억원
실력 계속 쌓으니
외환위기도 기회

1997년 11월 1일은 기계설비업체 ㈜엠텍이엔지의 창립일이다. 사장 강성진(41)씨가 한보철강에서 정리해고된 날이다. "나이 드신 공장 선배가 갈 데가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대신 정리해고당했죠. 사실 그 전부터 회사가 어려워진 것 같아 그만두고 사업을 할까 구상하던 때였죠."

패기 하나만으로 창업에 나섰다. 사업자금은 200여만원. 믿는 구석은 질 좋은 기계설비를 값싸게 만들면 농공단지에 입주한 업체들에 먹혀들 것이라는 배짱뿐이었다. 하지만 그해 겨울은 냉혹했다. 한국전쟁 이후 최대 국란이라는 외환위기가 터졌다. 창업치고는 시기를 지독하게 잘못 선택한 셈이었다. 외환위기 이후 농공단지 업체 중 70%가량이 문을 닫았다. 그해 매출은 달랑 36만원. 생활비로 부인에게 건넨 것은 실직수당으로 받은 50여만원이 전부였다. 그해 성탄절, 강씨는 큰딸의 돌 상을 차리지 못했고, 아내는 눈물만 펑펑 흘렸다.

99년 봄 기회가 찾아왔다. 환영철강에서 3억여원짜리 설비를 수주했다. "경쟁업체들이 6억~7억원을 부르던 공사를 반값에 14일 만에 끝내자 업계에서 보는 눈이 달라집디다."

외환위기는 강씨에게 몇 가지 교훈을 줬다. '불안하면 어음 사절'이 그중 하나다. 강씨는 아무리 일감이 탐나도 어지간히 확실치 않으면 어음은 받지 않았다. 그 바람에 쪼들리긴 했어도 느닷없는 부도의 위험은 피했다. 아무리 어려워도 직원 월급은 한 번도 어기지 않았다. 옛 공장 동료였던 직원들 사정을 뻔히 아는데 월급을 미룰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돈이 급하면 차라리 자재 대금을 미뤘다. IMF 관리체제는 강씨에게 위기와 기회를 동시에 선사했다. 거래할 업체들이 줄줄이 쓰러진 것은 위기였다. 하지만 동시에 기존 경쟁업체들이 쓰러지면서 지연.학맥에 의존한 구매 시스템이 무너지자 실력과 경제성을 갖춘 신생 업체에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강씨의 회사는 현대제철.환영철강.대한제강 등 메이저 철강업체들과의 거래를 트며 급성장했다. 지난해 강씨 회사는 3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직원도 정규직만 30여 명인 탄탄한 회사가 됐다. 이미 2년치 일감을 따놓은 상태다. 2005년 세운 중국 현지법인도 올 하반기부터 본격 영업에 들어간다.

강씨는 한보철강의 수천여 정리해고자 중 가장 성공적인 케이스로 꼽힌다. 돌아보면 외환위기가 그에겐 기회였다. 요즘 그는 현대제철의 고로건설에 대비해 각종 부수 설비를 준비하고 있다. "전엔 앞이 안 보였는데 이젠 계획하고 경영할 수 있는 정도까지 됐습니다." 강씨가 부르는 희망가다.

철강회사 복직한 최종현씨

일용직 전락하고
정부보조 받기도
정규직으로 돌아와
작년 5700만원 받아

한보철강 A열연공장 압연파트의 최종현(42)씨는 그해 1월까지만 해도 반년 뒤 셋째를 갖는 기쁨에 부풀어 있던 전형적인 중산층 근로자였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회사 부도는 최씨의 인생을 뒤흔들었다. 가동 중이던 공장이 98년 6월 멈추면서 최씨는 휴직을 당했다. 고용보험금이 나왔지만, 부도 전 150만원이 넘던 월급은 80만원으로 줄었다. 800%나 되던 보너스는 엄두도 못 냈다. 식구는 더 늘어났다. 셋째에 이어 넷째까지 연년생으로 태어났다. 딸 넷을 둔 그로선 한푼이 아쉬웠다. 휴직 중이던 최씨는 건축현장 일용직으로 나섰다.

2000년 12월 급기야 정리해고 통보를 받았다. 눈앞이 노랬다. 최씨는 당시 막바지였던 서해대교 건설 현장으로 나갔다. 바지선 위에 올려놓은 수십 m 높이의 크레인 위에 올라가 교각을 보수하는 일용직이었다. 작은 파도에도 크레인은 크게 흔들렸고, 최씨는 하루에도 몇 번씩 생사를 오락가락했다. 그는 "겁나게 위험했다"고 회상한다.

가장(家長)의 해고는 전업주부였던 부인 최기호(42)씨의 생활도 180도 바꿔 놓았다. 부인 최씨는 용역업체 비정규직 등을 가리지 않고 일거리를 찾아 나섰다. 어느 일이든 한 달 동안 죽어라 일해야 손에 쥐이는 돈은 60여만원에 불과했지만 그 돈이 최씨에겐 더없이 소중했다.

부모가 다 일터로 나간 집안은 스산했다. 초등학생이던 큰딸을 제외하고 나머지 딸 셋은 정부 보조금으로 어린이집에 종일 맡겨졌다.

어둠 속에서도 슬며시 희망이 찾아왔다. 한보철강을 인수한 현대제철이 예전에 공장을 돌렸던 직원들을 불러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최씨도 2004년 12월 동료 100여 명과 함께 재입사했다. 현대제철은 한보철강 부도로 7년여간 흉물스럽게 방치돼 있던 B지구 열연공장과 냉연공장을 신속하게 재건하기 시작했다. 공장은 일자리를 가져왔다. 564명까지 줄었던 근로자 수는 2800여 명으로 늘었다. 폐허나 다름없었던 한보철강은 한 해 1000여억원의 이익을 내는 알짜 철강회사로 거듭났다. 최씨의 지난해 봉급명세표에는 5700만원의 연봉이 찍혔다. 가정엔 웃음이 다시 찾아왔다.

지난 10년간 최씨는 업계 최고 연봉의 정규직 근로자에서 일용직 건설근로자를 거쳐 다시 정규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마음속 한 구석엔 그늘이 여전하다. "고향에 다시 돌아온 기분입니다. 그러나 아직 협력업체에 남아 있는 옛 친구들을 볼 때가 가장 미안합니다. 대우가 많이 다르거든요."

외환위기 때 이장 지낸 김성혁씨

한보 부도나자
주민들 일감 잃어
마을에 생기 돌자
후배들 속속 귀향

"10가구 정도가 떠났어요. 20~30대 젊은이 중 절반은 일자리가 없어 놀았으니까요." 98년부터 내리 4년간 당진군 송악면 고대리의 이장을 지낸 김성혁(44.횟집 운영)씨는 외환위기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갑작스레 닥친 한보철강 부도와 곧 이은 외환위기는 주민들의 삶을 벼랑으로 내몰았다. 한보철강 부도는 마을 주민들의 일감을 앗아갔다. 외환위기 전까지만 해도 웬만한 일용직은 일당 10만원, 청소만 해도 5만원을 받던 당진이었다.

파산하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일자리가 없어지자 은행 빚으로 생활비를 때웠던 사람들이다. 당시 이장이었던 김씨는 맥없이 놀고 있는 주민들을 공공근로사업에 동원해 일당을 챙기도록 주선했다. 김씨는 "지금도 독거노인에게 생계보조금을 받게 해드리지 못한 게 마음에 걸린다"고 했다. 마을 곳곳에 끼었던 주름이 펴지기 시작한 것은 2004년 말. 한보철강이 현대제철에 인수되고, 협력업체들이 내려오면서 다시 일자리가 나타났다.

"먹고살 길을 찾아 고향을 등졌던 후배들이 다시 귀향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도 세 명이 돌아와 노부모를 모시고 살게 되면서 사라졌던 웃음이 다시 마을에 퍼지고 있습니다."

김씨의 횟집도 외환위기가 가져온 10년의 결과물이다. 97년 한보철강 후문 앞에 있었던 김씨의 20평 호프집은 줄을 서야 할 정도였다. "돈을 줍는다고 할 정도였다"고 김씨가 회상할 만큼 경기가 좋았다. 매출이 하루 60여만원에 달했다.

하지만 한보철강 부도 후 사정은 완전히 달라졌다. 언제 그랬느냐는 듯 손님은 뚝 끊겼다. 김씨는 호프집을 닫고 공장 가동을 시작한 동부제강 쪽에 포장마차를 열어 조개구이를 팔기 시작했다. 김씨는 허리띠를 졸라맸다.

"나는 그래도 나았어요. 땅이 있어 그나마 포장마차라도 할 수 있었으니…. 그렇지 않은 사람은 무지하게 힘들었습니다."

사실 그랬다. 음식점들이 경기를 가장 많이 탔다. 한보철강 건설 인부들을 겨냥해 열었던 식당들은 다들 문을 닫았다.

김씨는 포장마차가 본 궤도에 오른 4년 뒤 지금의 횟집을 열었다. 현대제철이 정상 가동되고 인근 공단에 공장들이 들어오면서 매출이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요즘 수입은 10년 전 수준을 회복했다. 이젠 두 자녀(중2, 초5) 학원비도 원 없이 쓴다. "당진읍내 분위기가 사뭇 다릅니다. 장사하는 분들은 다들 잘된다고 해요. 이젠 IMF를 다 극복했어요. 저도 그렇고요."

글이상렬 기자<isang@joongang.co.kr>
사진=김형수 기자 <kimh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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