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민중교육』 필화사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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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군사부일체」 또는 「스승의 그림자는 밟지 않는다」는 말처럼 우리 사회는 예부터 「선생님」을 존경하고 추앙해왔습니다. 피고인들의 교육에 대한 열정과 이미 교사직에서 파면된 점 등을 참작, 징역3년·자격정지3년부터 징역2년·자격정지2년까지를 각각 구형합니다.』
무크 『민중교육』과 관련,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 기소된 김률경·윤재철·송기원씨에 대한 구형공판이 열린 1986년1월28일. 담당검사는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을 가르치는 현직교사들의 「용공이적」은 가장 위험한 일이기에 법정최고형으로 다스려야 마땅하나 피고들이 전통적으로 존경받는 「스승」임을 감안, 위와 같이 구형한다고 밝혔다.
검사구형에 대해 최후진술에 나선 윤씨는 『교단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교단으로 돌아가겠습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하고 『「우리는 그렇게 나쁜 선생님들한테 배우지 않았습니다. 우리선생님을 돌려주세요」하며 호소하던 학생들의 외침이 가슴에 닿아 맺힌다』며 피고석에 선 심정을 말했다.
김씨는 『전국 30만 교사들이 교단에서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법의 정신」이 부정되지 않는 납득할만한 판결을 바란다』고 밝혔다.
교사 20명이 선생으로서는 사형이라고도 할 파면 등 징계조치를 당하고 3명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실형까지 산 「민중교육필화사건」. 이 사건으로 성역으로 치부되던 교육현장이 사회문제로 부상, 결국 전교조 결성으로 이어졌다.
그 전교조를 문교부장관 때 탄압했다는 이유로 최근에는 스승으로서의 마지막 수업을 하던 정원식 총리가 대학생들로부터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민중교육』1집에는 교수·교사·학생들이 참석한 좌담 「분단상황과 교육의 비인간화」와 「교육의 민주화」를 주제로 한 교사들의 특집 논문 5편, 그리고 시·소설·서평 등이 실렸다. 이 잡지를 면밀히 검토한 교육위원회측은 이른바 「의식화」된 대학생들의 현실시각과 궤를 같이한다』고 보고 조목조목 내용을 적시했다.
『문교부의 획일적인 지시사항은 「문교부-교육구청-교장-교감-각부주임-담임-학생」, 이렇게 군대의 지휘계통을 방불케 하는 통로를 통해 전달된다.
학생이나 교사의 의견이 전혀 반영되지 않는 상황에서 상의하달만 제도화된 교육의 국가독점에 문제가 있다.』
『교사직은 성직이므로 시민으로서의 권리가 제한되어도 좋다는 논리는 학교교육을 자기집단의 이익에 봉사하는 노예교육으로 삼으려는 비민주적 지배자의 논리다.』
『교원노조운동(60∼61년)은 교육의 민주화와 정치적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목표로 해서 평교사들이 주체가 되어 일으킨 한국역사상 최대의 자생적인 교원운동이었다.』
이 같은 내용들이 잘못된 의식화를 부추키는 사례로 꼽혔다.
또 『소설 「비늘눈」은 지방대학 졸업생이 서울 사립학교에 취직하는 과정에서 금품이 오가는 모습에 회의를 느끼고 취직을 포기하는 내용으로 이것도 문제가 있다』고 지적됐다.
교육위원회는 이 같은 사례를 들면서 『2세 교육을 맡고있는 현직교사의 좌경의식화는 초기에 차단되지 않으면 그 파급도가 엄청날 것으로 판단된다』며 관계교사 전원에 징계조치를 내렸다.
당국의 이러한 강경한 탄압은 총선을 겨냥한 84년의 유화국면이 85년 2·12총선에서의 여당의 패배와 이에 따른 각계의 민주화 요구가 격화됨에 따라 이를 잠재우기 위한 강공책으로 나온 것이라는 게 당시 일반적 시각이었다.
이 같은 당국의 조치에 대해 85년8월10일 『민중교육』 관련교사 일동은 「우리는 제도교육 자체를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제도교육의 역기능을 비판하고 시정을 촉구함으로써 바람직한 교육의 출발점을 삼고자한 것이었다. 또한 우리의 제언들은 교육현상을 정치·사회·경제·문화 등 제반분야와 관련지어 과학적이고 구조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였다. 우리는 우리의 입장이 교육자로서의 양심에 비추어 조금도 거리낄 것이 없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한 「거리낄 것 없는 교육자로서의 양심」은 모두 징계 당하고 국가보안법위반으로 법정에까지 서게 된 것이다.
85년8월 여름방학중 졸지에 교단에서 쫓겨난 교사들은 다각도로, 복직투쟁을 벌였다. 당시 경북영풍 부석고 교사로 있다 『민중교육』에 「야학일지」란 글을 기고, 파면 당한 송대헌씨는 행정소송을 제기, 3년간의 법정투쟁 끝에 87년12월11일 고등법원으로부터 『「민중교육」지의 내용이「좌경·용공」이 아니며 「교사가 교육에 대한 비판적인 글을 써 발표한 것이고 어떤 직무상의 의무, 또는 품위유지 의무에 위반한 것이라 할 수 없다』는 승소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그러한 승소판결이 나오고 사면· 복권될 때까지의 교사들의 삶은 참담했다. 파면 당하자마자 동료교사들이 모아준 8백만원으로 85년11월10일 사무실을 세내 「교육출판기획실」을 차린 17명의 해직교사들은 이를 토대로 법정싸움도 벌이고 학원강사로 밥벌이도 했다.
그러나 이들을 주축으로 86년5월15일 「민주교육실천협의회」를 구성하고 또 기존의 YMCA중등교육자협의회가 5월15일 교육민주화선언을 하고 나섬으로써 당국은 교육운동에 대한 탄압을 강화, 해직교사들을 학원강단에도 설 수 없게 만들어버렸다. 이러저러한 사설학원에 나가 강단에 섰던 해직교사들은 학원측으로부터 『기관에서 압력이 들어오기 때문에 당신들을 쓸 수 없다』는 통보를 86년 말 일제히 받고 다시 「해직」된다.
이들은 87년 2월 해직 징계에 대한 사면·복권으로 대부분이 교단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전방조사건으로 다시 많은 사람들이 해직되는 비운을 맛볼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교과위원회 위원장·정책실장·편집실장 등 전교조의 핵심으로 있으면서 다시 복직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
『직장 사무실에서 내려다 보이는/강남의 영동중학교에서/스승의 노래가 울러 퍼졌습니다./나는, 돌아오겠다고 하고는 돌아가지 않은/교단을 생각합니다. /이미 고등학교를 졸업했을/병광이며 선희며/얼굴만 아슴아슴한 제자들을 생각합니다./그 해 85년 스승의 날 /내가 병아리 교사였을 때/제자들이 달아준 가슴의 꽃 때문에/종일 쩔쩔매던 나는/이제는 꽃 때문에 부끄러워 쩔쩔맬 일은/없습니다./복직이 되었던 어떤 친구들은/또 해직이 되어 교실에서 좇겨났는데 /철없는 아내는/남편이 해직될 일을 걱정하지 않아서 좋다 합니다.
충남부여 외산중 교사로 있다 『민중교육』필화로 사직 당한 전무용씨가 최근 발표한 시「스승의 날에」전문이다. 교단으로 돌아가 제자를 가르치며 어울리고 싶은 스승의 마음, 그러나 풀리지 않은 안타까운 현실이 간절히 내비친다. 85년8월 한 잡지에 관련된 교사 전원을 징계한 강압적이고 정권유지에만 급급했던 초치는 오히려 교육문제를 사회문제의 핵심으로 끌어올렸다. 「민중교육 필화사건」의 관련자들이 처음으로 현실교육에 비판을 가했던 교육현장의 문제는 전교조로까지 이어지고 우리 사회가 물어야 할 가장 큰 숙제로 남아 있다.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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