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수학·과학 교육은 국가적 어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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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교육부의 제8차(수시) 교육과정 개편 상황을 살펴보면 문제가 심각하다. 처음에는 과학 및 기술.가정이라는 과목군 속에 물리I.II, 화학I.II, 생물I.II, 지구과학I.II와 농생명과학, 해양과학, 가정과학, 창업과 경영, 공학기술, 정보통신기술과 컴퓨터 과목들을 포함해 놓고 이과 지망생들에게 이 중 4~5과목을 선택하도록 하는 제도를 제시했다. 그러다 얼마 후 전 과목을 8개 정도의 과목군으로 나눈 뒤 각 과목군에서 한 과목씩 필수로 지정하고 나머지는 자유 선택으로 하는 새로운 제도를 제시했다. 며칠 전엔 또 교육부총리가 인문사회, 과학기술, 예체능, 외국어, 교양의 5개 필수교과목군을 현행대로 유지하겠다고 번복했다.

이같이 갈팡지팡하고 있는 교육과정 개편에 대해 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과총), 바른 과학기술사회 실현을 위한 국민연합(과실연), 과학기술한림원, 공학한림원, 자연대학장협의회, 공대학장협의회 등 6개 과학기술단체가 10일 공동 기자회견을 열고 문제를 제기했다. 수학.과학.기술가정을 각각 별개의 독립된 교과군으로 설정하고 수학.과학을 필수 과목으로 지정할 것을 요구했다. 나아가 문.이과 구분 없이 모든 학생들이 수학.과학.사회 과목들을 각각 두 과목 이상 반드시 이수하게 할 것을 주장했다.

교육부가 도입한 선택 위주의 교과 운영은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고교 교육 현실은 다양한 선택 과목들을 수용할 선생님과 시설을 갖추고 있지 않다. 선택 과목이 많으면 학생들은 어려운 수학.과학보다 쉬운 과목, 대입과 수능에 유리한 과목을 선택하게 된다. 2004년 통계에 의하면 고 2, 3학년의 과학I 이수율은 전체 학생의 25.8%였다. 자연계열 학생들 가운데 20%는 과학I조차 선택하지 않았다. 또 과학II 이수율은 9.7%로 매우 저조하고, 그 가운데 수능 응시율은 6.1%에 불과했다.

수학.과학의 기초가 없는 학생들이 대거 대학에 입학하면 대학에서 배우는 학문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다. 그리고 부실한 실력은 그대로 기업이나 연구소로 전이돼 심각한 국가경쟁력의 위기로 이어진다. 이 같은 문제점들을 확인하고 일본은 소위 '유도리(餘裕) 교육'의 전면적인 개편작업에 들어갔다. 그런데 이것을 본떠 만든 우리나라 7차 교육과정은 8차(수시) 교육과정으로 개편되면서 오히려 교과목 선택성을 강화하고 있다.

미국의 과학한림원, 공학한림원, 의학원은 지난해 미국이 장래 경제적 번영을 유지하기 위해 가장 시급한 과제를 연구해 달라고 의뢰한 의회에 네 가지 과제를 제시했다. 그중 첫째가 유치원~고3(K-12) 교육이었다. 유치원에서 고3까지의 과학.수학 교육을 크게 향상시켜 미국의 인재풀을 증가시킬 것을 첫 번째 국가적 어젠다로 제시했다. 실천방안으로서 매년 1만 명의 수학.과학 교사를 양성하고 25만 교사들의 능력을 강화할 것을 제안했다.

수학.과학은 수많은 과목 중 하나가 아니다. 한 나라의 경제 전반을 좌우하는 핵심요소다. 지금 수학.과학의 씨를 뿌리면 내일의 국가 번영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상태로 방치하면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수학.과학 교육은 국가적 어젠다다. 수학.과학은 당연히 필수 교육이 돼야 한다.

이병기 '바른 과학기술 사회 실현을 위한 국민연합'상임대표
서울대 공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