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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산'을 아시나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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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웰빙(참살이) 바람이 불면서 아파트에 미니 정원을 꾸미는 사람이 늘고 있다. 발코니에 물레방아.초가집 등을 배치해 옛 정취를 느껴보려는 이도 있다. 삭막한 콘크리트 세상에 초록빛 자연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더 했다.

산을 통째로 집안에 불러들였다. 이른바 석가산(石假山)이다. 돌을 쌓아 만든 '인공산'이다. 하지만 '가짜'는 아니다. 선비들은 실제 산보다 석가산을 귀하게 여기곤 했다. 마당에 정원이나 연못을 꾸밀 때 석가산은 필수품과 같았다. 돌을 나지막하게 쌓아 골짜기를 만들고, 여기저기 나무도 심어 계곡을 빚어냈다.

석가산 모양의 벼루와 연적(硯滴)을 만들어 사랑방에 비치하기도 했다. 그만큼 자연을 가까이하고, 나아가 자연과 하나가 되고 싶어했다.

하지만 석가산은 근대 이후 격변의 한국사에서 까맣게 잊혀져 갔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이름조차 생소해졌다. 전화(戰禍)와 산업화 속에서 선비들의 풍취를 돌아보는 여유가 없었던 셈이다.

박경자(문화재 전문위원) 전통경관보존연구원장이 한국 조경문화의 핵심 요소인 석가산의 전통을 되살려냈다. 석가산이 있는 전국의 유적을 답사했고, 한학자들과 힘을 모아 석가산 관련 시.산문 130여 편을 한글로 번역했다.

◆사대부의 재발견=경남 함안군 칠원면 무기리에는 조선 후기의 연못인 무기연당(중요민속자료 208호)이 있다. 1728년 이인좌의 난 때 의병을 일으켜 큰 공을 세운 주재성(1681~1743)의 덕을 기리기 위해 조성한 곳이다. 직사각형 형태의 연못 가운데에 봉래산(蓬萊山.신선이 살았다는 중국의 전설상의 산)을 연상시키는 석가산이 있다. 높이는 2m 내외. 연못 북쪽의 정자에서 1년 365일 석가산을 완상할 수 있다.

사대부들은 석가산에 지인들을 초대해 시를 읊고 글을 지으며 친목을 도모했다. 15세기 중반 문신인 성삼문(1418~56)부터 20세기 초반 학자인 허훈(1836~1907)까지 명맥이 이어졌다. 소위 '가산문학'이다. 사대부들에게 석가산은 삶과 자연을 반추하는 사색의 공간과도 같았다.

"흙을 모아 섬돌 앞에 작은 산을 만드니/봉우리.숲.골짜기 모두 재주 부려 나왔네/아침에는 지척에서 안개가 일어나니/앉아서 아득한 안개 속에 그윽한 마음을 부치네."

조선 전기 문인인 신숙주(1417~75)가 안평대군(1418~53)이 인왕산 북쪽 골짜기에 지었던 비해당에 있는 가산을 보고 읊은 시다.

◆신선(神仙)의 꿈=석가산은 동양 전통의 신선사상과 도교사상이 조형물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고대 중국부터 조성되기 시작했다. 영원히 병들지 않고, 늙지도 않는 장생불사(長生不死)의 염원이 담겨 있다. 삶과 치세의 원리로 유교를 내세웠던 선비들도 개인생활에선 도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증거다.

실제로 유교의 대표적 경전인 '논어'에도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智者樂水 仁者樂山)'란 문구가 나온다. 선비들은 석가산을 보며 자연과의 일체를 꿈꿨다. 인공과 자연, 진짜와 가짜, 무(無)와 실재, 아름다움과 추함의 경계가 사라진 이상향을 희구했다.

숙종 때의 학자 김춘택(1670~1717)은 "두어라, 산이 진짜인가 가짜인가를/산은 없기도 하고 있기도 하다/그대에게 바라노니 부지런히 도를 배우면 끝내는 유무의 관문을 뚫게 될 걸세"라는 시를 남겼다.

◆한.중.일 연구=석가산은 한.중.일 3국의 공통유산이다. 돌로 만들면 석가산, 나무로 만들면 목가산(木假山), 옥으로 만들면 옥가산(玉假山)으로 부르기도 했다. 한국에선 '기이한 돌'이라는 의미로 '괴석(怪石)'을 쓰기도 했다. 또 일본에선 '돌을 쌓았다'는 뜻에서 '축산(築山)'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박 원장은 "중국과 일본에 비해 한국의 석가산은 아쉽게도 남아있는 게 적어 연구 또한 미진하다"며 "향후 고택.정원 등 유적지 정비.복원에 석가산을 포함시켜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석가산이 온전하게 전해지는 곳은 무기연당, 경남 함양의 정여창 고택, 충남 논산의 윤증 고택 등 서너 곳에 불과한 실정이다. 그는 이번에 펜화가 김영택씨의 도움을 받아 조선 전기 문인 채수(1449~1515)의 석가산 등을 그림으로 복원하기도 했다.

퇴계 이황(1501~70)이 국화를 심은 석가산을 보내온 친구에게 감사하며 한 수 읊었다. "한 잔 술 마시고 웃으며 은근한 뜻을 받아들이니/푸른 안개와 맑은 향기는 담담하여 있는 듯 없는 듯."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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