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사마천 저 『사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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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아주 오랜 옛날부터 한자문화권에 속해 있는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는 중국 최초의 정사인 『사기』와 그 저자 사마천은 무척 귀에 익은 이름이다. 그러나 20세기 중반부터 물밀듯이 유입된 서양문화의 영향으로 이 책의 내용과 가치 및 저자의 일생과 학문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실정이다.
일본에서는 이미 수 십년 전에 완역본이 출간되었고, 대만에서는 70년대에, 그리고 중국에서는 1988년에 백화 완역본이 나왔으나 우리 나라에서는 아직 완역본이 출간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 준다하겠다.
사마천은 대대로 천문·점복·제사 등의 일을 관장한 사관가문 출신으로 한경제 말기 또는 무제 초기에 지금의 합서성 한성현 지천진이란 곳에서 태어났다. 그는 이 곳에서 평범한 시골 아이로 자라가 10세 때 부친 사마담을 따라 수도장안으로 옮겨감으로써 비로소 배움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청소년기의 그는 당시의 다른 청소년들과 마찬가지로 소학서와 유가의 경전을 주로 배웠지만, 특수한 집안배경으로 인해 고문자와 『상서』 『춘추좌씨전』 『국어』 『계본』 등의 역사서적을 특히 많이 읽었다. 이렇게 서적을 통한 지식습득 과정을 거친 다음, 청년기에 들어서서 부친의 배려로 중국의 합서·하남·호북·호남·강서·절강·강소·산동·안휘성 등의 광범한 지역을 여행했다. 이 여행중에 이들 각 지역의 자연환경과 민정, 그리고 옛 선인들에 대한 고고학적인 자료들을 수집할 수 있었다.
다행히도 그는 관직생활을 시작한 후에도 각 지역을 여행할 수 있는 기회를 여러 번 가지게 되었다. BC l1l년에 그는 당시 황제였던 무제의 사신으로 서남쪽의 변방국을 다녀오면서 지금의 사천·귀주·운남·광동·광서성 등지를 살펴볼 수 있었고, 황제가 직접 참여하는 순행이나, 봉선제를 비롯한 조정의 여러 행사 때 황제를 수행함으로써 중원지역은 물론이고 동북부지역의 명산대천을 직접 살펴볼 수 있었다. 전국 각 지역에 대한 광범하고 누적된 여행경험들은 그의 『사기』저작에 무엇보다도 소중하고 풍부한 밑거름이 됐다.
그는 부친 사마담의 영향을 매우 많이 받았는데, 사마담은 임종 때 그에게 두 가지 사항을 유언으로 당부했다. 하나는 그에게 제2의 공자가 되라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자신이 이루지 못한 『사기』의 저술을 완성하라는 것이었다. 사마담이 세상을 떠난지 3년 후(BC 108년) 그는 마침내 부친의 뒤를 이어 대사령이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한편으로는 부친의 유언에 따라 『사기』를 집필하기 시작했고, 또 한편으로는 직무에 온 정성을 다함으로써 매우 만족스러운 생활을 영위했다. 특히 그는 BC 104년, 그때까지 사용해왔던 진력을 폐지하고 그의 주관하에 제정한 대초력을 사용하도록 하고 연호도 태초로 고치기까지 하였다.
이처럼 순조롭던 그의 일생은 BC 99년에 발생한 이능의 사건에 대해 직언을 서슴지 않은 탓으로 궁형이라는 극형을 언도 받게 됨으로써 생사의 갈림길에 놓이게 된다. 이때 그는 부친의 유언을 머리 속에 되새기며 이 엄청난 수모와 고통을 참아내기로 결심하고 4년의 옥고를 견뎌냈다. 그 후 그는 태사령보다 더 높은 중서령의 관직에 올라 맡은 일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한편, 『사기』 저작에 더욱 몰두해 46세 되던 해(BC90년)에 마침내 이를 완성함으로써 천고에 빛나는 불후의 명작을 탄생시키게 되었다. 그러나 『사기』의 저술을 완성하고 난 이후 사마천의 행적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려진 것이 없으며 다만 무제말년이나 소제 초년께 옥사하지 않았나 하는 주장이 있을 뿐이다.
『사기』는 기전체 역사서의 효시임과 동시에 최초의 정사로서 이후의 중국 정사의 모형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문학사에 있어서도 가장 훌륭한 산문 또는 전기 작품으로 손꼽힌다. 사마천은 「자연세계와 인류사회의 관계를 규명하고 고금의 역사발전 대세를 밝히기 위해」 이 책을 저술했다고 밝혔다.
『사기』는 황제부터 한·무제까지 약 3천년동안의 역사를 기록한 통사로 12편의 「본기」, l0편의 「표」, 8편의 「서」, 30편의 「세가」, 그리고 70편의 「열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기」는 제황의 세대순으로 정치·군사 등 천하대사를 기록한 것이며, 「표」란 역대 제왕과 제후국의 정치·군사 등 대사를 시대순으로 배열한 도표고, 「고」란 경제·문학·천문·역법 등에 대한 전문적인 논술문이며, 「세가」는 선진시대의 제후국과 한나라 조정의 공신들에 대한 전기고, 「열전」은 특기할 만한 인물들에 대한 전기다.
그런데 『사기』는 당시에 성행했던 음양오행설에 가까운 「천명론」을 부정하고 인간을 역사의 중심으로 서술하는 한편, 역사는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발전한다는 역사관에 입각해 사실을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기록한 역사서임에 틀림없으나 사마천은 이를 통해 자신의 분노와 불평, 사랑과 증오, 사상과 학문, 그리고 절조와 인격 등 모든 정신세계를 다 쏟아 넣음으로써 독특한 명작으로 손꼽힌다. 그는 백이·숙제를 「열전」 첫머리에 배치한 다음 이에 대한 평론에서 『어떤 이는 「천도에는 편애함이 없고 늘 착한 사람을 도울 뿐」이라고 말한다. 백이와 숙제 같은 사람은 착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단 말인가. 그처럼 어진 덕을 쌓고 품행을 수양하였는데도 끝내 굶어죽고 말았다.…… 그러나 행위가 법도에 어긋나고 나쁜 일만 골라해도 평생을 부귀와 영화 속에서 편안히 지낼 뿐만 아니라, 이런 부귀영화가 몇 대에 걸쳐 이어져가는 사람도 있다.……만약 이를 천도라고 한다면, 도대체 천도란 옳은 것인가. 아니면 그른 것인가』라고 했는데 이는 그가 겪은 수모와 분노, 그리고 사랑과 증오를 가장 함축적이고 상징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사마천은 또 『사기』의 여러 곳에서 황노사상이 가장 이상적인 것이라는 생각을 보여주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그만 제후국인 노나라의 대부에 지나지 않던 공자를 「열부」에 배열하지 않고 제후들에 대한 부기라고 할 수 있는 「세가」에서 서술하면서 「소왕」이라고까지 추앙했을 뿐만 아니라 공자의 제자들에 대해서도 「중니제자열전」을 특별히 따로 배려해놓았는데, 이런 점들은 그가 유가사상을 얼마나 높이 평가했는지를 잘 알게 해준다. 그리고 20세기 초에 발견된 갑골문의 기록과 20세기 중반 초까지만 해도 중국문학계에서 선사시대로 분류했던 은대에 대한 『사기』의 서술내용이 서로 일치된다는 사실 및 「봉선서」를 비롯한 여덟 편의 책은 그의 학문세계가 얼마나 깊고 넓은지 잘 드러내준다 하겠다.
또한 「본기」 「세가」 「열전」 등에서 사마천은 정의와 진리를 찬미하고 추악함과 불의를 폭로하고 질책하면서 중국의 문학전통에서 강조되는 풍자의 극치를 보여 주며, 시문을 범용한 생동적인 문체와 선명한 표현력 및 극적인 묘사 등으로 중국문학사에 있어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사기』는 인간사회의 삶의 본질과 경험을 가장 진솔하고 풍부하게 함축하고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손준철(한양대 중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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