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영 칼럼] 저비용 고효율의 수사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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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평화는 다른 수단에 의한 전쟁의 연장이다. 의미보다 레토릭이 근사해서 그런지 그 변주가 다양하다. 정치학도들은 낄낄 웃겠지만 경제학자 에드워드 넬은 "정치학은 때때로 다른 수단에 의한 경제학"이라고 설파했다. 그것을 '재변주'하면 글쎄 "경제는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쯤 될까? 이번에는 경제학도들이 펄쩍 뛰리라.

*** SK 불운 과연 베팅 잘못이었나

요즘 나는 경제가 정치의 연장이란 사실을 절감한다. 무엇보다 달래서 줬더니 오라가라하는 세태가 그렇지 않은가? 사실은 달래서 준 것이 아니라, 안 주면 신상에 해롭다고 해서 내놓은 것뿐이다. 물론 이런 의문도 있다. 진짜로 달래서만 준 것이냐, 제발 받으시라고 갖다바친 것은 아니냐? 이런 물증이 있다. 자산 2조원 이상의 31개 그룹 계열사를 대상으로 대한상의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63.3%가 '불이익이 두려워' 정치 자금을 내고, 3.3%만이 '반대 급부를 바라고' 냈다. 이 대답을 곧이곧대로 믿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돈을 받은 사람조차 펄쩍 뛰었을지 모른다.

SK그룹의 손길승 회장은 한나라당에 건넨 1백억원이 자의가 아닌 강요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이 말을 믿고 싶다. 그러나 "김대중 정권 4년 동안 민주당에 1백40억원, 한나라당에는 8억원이 갔다"는 대목에서 그만 혓바닥을 차고 말았다. "에이, 쥐어뜯기게도 됐네. 하루이틀 장사할 것도 아니면서…." 그의 말대로 여야 배분의 관례가 6대4라면 이를 깡그리 무시하고 70대4로 '내 돈 내 맘대로' 배짱을 부린 것이기 때문이다. 누가 야당이라도-그것도 집권을 떼어논 당상으로 여기던 야당으로서는-나중에 보자고 눈을 부라렸을 법하다. 그런 사태는 경제를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로 생각한 나머지 결국 기업이 '자초한' 것이다.

SK의 불운은 베팅 잘못에 있었다. 아니 베팅은 기가 막혔는데 하늘처럼 믿었던 여당의 운수가 다한 것이 죄일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70대4의 실수라든가 "DJ 같은 방패막이" 부재를 자책하기 전에 그 도박 자체를 자제했어야 한다. 이번에는 독자들이 펄쩍 뛸 일이다. 아니 그걸 누가 몰라서 못한 거야? 정치권은 돈 안 드는 정치를 염불처럼 되뇌고, 재계 역시 윤리 헌장에서 자정 대회까지 반성과 결의를 간단없이 반복했었다. 孫회장의 발언 중에 "386 검사들의 변화를 못 읽은 것이 문제가 됐다"는 대목이 자못 흥미로웠다. 모처럼 기세를 올렸다가 벌써 틀어지는 정치권의 개혁 약속에 또 한번 쓴침을 삼키면서 그 반사적 기대를 검찰에 보내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급한 대로 두 가지 얘기를 전하고 싶다. 먼저 정권으로부터의 독립이다. 우리 검찰은 신종 '정치 보험론' 분야에-일례로 보험성.대가성 감별에-탁월한 능력을 발휘해 왔다. 수억원을 먹은 사람도 '대가성 없음' 판정으로 무죄를 만들고, 기백만원만 받아도 대가성 혐의로 철창으로 보냈기 때문이다. 병아리 감별사처럼 숙달된 이 재주는 때때로 기획 수사니, 표적 사정 따위의 의혹과 반발을 불러왔다. 현재의 대선자금 수사 강공 역시 적잖은 사람들이 검찰의 독자적 의지의 산물로 보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검찰권 행사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여서는 아무리 훌륭한 수사 결과로도 국민을 설득하지 못한다.

*** 병아리 감별사로 오해받는 까닭

다음으로 경제 상황에 대한 고려다. "광주는 IMF가 들어올 때도 잘 몰랐고 그게 떠난 뒤에도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어. 경제 기반이 아주 취약하거든. 그런데 요즘 문닫는 가게가 자꾸 늘어나는데, 도대체 매기(買氣)가 없다는 거야." 주석에서 토한 친구의 탄식인데 그게 어디 광주뿐이랴. 내수가 얼어붙은 탓이겠지만 그것을 녹여줄 기업은 자꾸 외국으로 빠져나간다. 무엇을 노리고 활기차게 나가는 것이 아니라 국내에서 견디다 못해 억지로 나가는 것이다. 여기 정치는 다른 수단에 의한 경제가 돼야 한다. 기업인을 소환한 검찰청 포토라인의 사진은 시청자에게 몸살나는 재미를 선사할지 모른다. 기업이 걱정하는 것은 수사 결과 못지 않게 그 과정에 드는 비용이다. 나는 이번 검찰의 수사 결과가 다시는 뽑지 않을 칼이 되되, 그 과정만은 짧고 빠르게 줄여 기업과 사회의 부담을 되도록 덜어주기 바란다.

정운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