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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송호근칼럼

청와대가 분 휘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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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개헌 논의 반대세력은 두 가지에 안심한다. 국민이 진정성을 의심하고 있고, 개헌 발의에 필요한 정족수를 못 채울 것이라는 점. 그런데 이것은 판세를 뒤엎고 싶은 노 대통령에게는 흥미로운 놀잇감이지 난공불락의 장애물이 아니다. 기자회견장에서 토로하였듯, 안될 것을 뻔히 알면서 강행했던 정치이력이 솔솔 오기를 지피고 있는 중이다.

사실, 개헌을 염두에 두었다면 17대 국회 초기에 공론화 과정을 거쳐 방향과 일정이 짜여야 옳았다. 왜 하필 '4년 연임'이고 '지금인가'를 반문하는 국민의 의구심은 충분한 근거가 있다. 그저 '무사고 운전'만을 고대하는 터에 웬 광풍인가 싶고, 추종세력을 다 잃은 호걸의 때늦은 절규인 듯 의아한 것이다. 국민은 민주화의 징검다리였던 5년 단임제가 이제는 효용성을 잃었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런데 노 대통령이 갑갑해한 '여소야대'가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여소야대는 무소불위의 대통령 권력을 견제하는 괜찮은 안전장치다. 공화당의 막강한 거부권에 포위되었던 클린턴 대통령이 어디 하고 싶은 일을 못했는가? 더 절박한 문제는 대권을 둘러싼 사생결단의 전투가 5년마다 반복되고, 그때마다 정당이 요동치고, 다 끝날 때까지 전 국민이 숨죽이고 기다려야 하는 한국정치의 구조적 가해성이다. 사회와 경제가 그래서 발육부진이라면, 원포인트 개헌은 해결책이 아니다.

잠시 돌이켜 보자. 1987년 이후 대선과 정권교체가 네 차례 있었다. 대선 정국을 1년으로 잡고 정권 초기 체제정비에 쏟는 서너 달을 합하면, 20년 중 약 5년 정도가 정권교체에 소비된 셈이다. 이 얼마나 아까운 시간인가? 민심교란과 이해충돌이 빚어낸 사회적 손실과, 통치권 약화로 초래된 경제적 손해는 얼마인가? 옛날 열쇠장수처럼 기발한 아이디어를 온몸에 주렁주렁 매달아야 주목을 끄는 대선 정국의 열기에 얼마나 더 들떠야 하는가? 통치자의 기질에 따라 풍향계처럼 바뀌는 정국에의 적응비용은 대체로 비생산적이다.

정당 불안정은 더 심각하다. 3년 전 열린우리당은 백 년 정당을 만들겠다고 호언장담했는데, 지금은 분당과 신당창당의 화염에 싸여 있다. 열린우리당 탓이 아니라 한국의 정치구조가 가해한 운명과 같은 것이다. 단임제에서 집권당은 지지도 하락과 실정(失政)의 책임을 대통령과 분담해야 한다. 정도는 덜 하지만, 4년 연임제에서도 사정은 같아서 정권 말기의 '탈출 러시'가 불가피하다. 지난 20년 동안 대선 정국에서 변신하지 않은 여당은 하나도 없었다.

이런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 있다면 시끄러워진들 어떠랴. 아예 대통령제를 폐하고, 내각제를 논의해도 좋겠다. 내각제라면, 대권 후보들이 백병전을 감행할 필요가 없고, 상호 비방에 핏대 올릴 일도 없다. 정치인.관료.사회세력들이 어디에 줄 설 것인지 주기적으로 눈치 볼 필요도 없다. 정당은 간판을 지긋이 달아둘 것이다. 지역.계급.세대정당이 국회 안에서 자웅을 겨루고, 힘이 달리면 연립정부를 구성할 수도 있다. 노 대통령의 자조적 말마따나 '어디서 굴러먹다 온 놈'이 갑자기 등극하는 일도 없고, 누가 실권자가 되든 정당이 버티고 있기에 예측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러나 포괄적 기획과 정교한 지도(地圖)가 없는 지금은 때가 아니다. 정치모델의 로드맵을 한번 만들어 보자고 했다면 몰라도, 사전 협의 없는 느닷없는 제안에 평지풍파가 일고 있다. 정권 말기, 대통령이 해야 할 평상적 과제도 벅찬 이 마당에 특별 권한을 행사할 여유가 있는지.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