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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고 혁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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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그렇다고 자선사업은 아니었다. 친구들이 과외교습하며 받는 만큼 돈을 받았다. 비웃음 소리가 더 커졌다. 그 돈 내고 올 학생들이 있겠나. 하지만 알음알음으로 찾아온 수강생 수가 이내 40명이 됐다. 주말에만 하다 보니 그 이상 받을 여력도 없었다. 대학원 때까지 7년 동안 매주 그만큼의 학생들에게 책을 골라주고 함께 읽고 느낌을 나눴다.

잠시 고민을 했다. 박사학위를 따서 학교에 남느냐, 아니면 본격적인 독서교실을 운영하느냐. 선택은 후자였다. 박사과정에 등록할 돈으로 40평 정도 되는 공간을 구했다. 이제 독서토론을 위해 학생들 집을 전전할 필요가 없을 터다. 수강생 수를 80명으로 늘렸다. 업으로 나섰다 해도 역시 주말에만 하기 때문에 그 이상은 무리였다. 그렇게 9년을 더 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독서토론교실 학생들은 '인디고 아이들'이라 불린다. 인디고(Indigo)의 쪽빛처럼 주체적이고 창의적이란 뜻이다. 그들은 '아람샘(아람 선생님)'과 매주 1~2권의 책을 읽고 토론한다. 문학.역사.사회.철학.교육.예술.생태.환경 등 편식 없이 고른 분야다. 그리고 한 달에 한 번씩 저자를 직접 초청해 토론회를 연다. '주제와 변주'라는 제목으로 22회를 이어온 토론회에는 정재서 교수와 김용택 시인, 성석제 작가 등 인기 저자들이 참석해 학생들과 속 깊은 대화를 나눴다. 토론 내용을 정리한 책도 벌써 두 권이나 냈다.

아람샘과 인디고 아이들은 지난해 또 한번 일을 저질렀다. 국내 최초의 청소년 인문교양지 '인디고잉(INDIGO+ing)'을 창간한 것이다. 지난해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무하마드 유누스와의 e-메일 인터뷰는 물론 '옥스퍼드 철학 사전'으로 유명한 영국의 사이먼 블랙번(케임브리지대 철학과) 교수와 '동유럽의 기적'이라 일컬어지는 슬로베니아의 문화비평가 슬라보예 지젝 등 세계적 석학들의 글을 받아 실었다. 학생들의 순수한 열정에 감동한 석학들이 무료 기고한 것이다.

이처럼 인디고 아이들은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고 토론하고 실천하며 국내외 저자들과 지적 교류를 하고 있다. 논술고사 원고지에 모든 것을 쏟아붓기 위해 프린트물로 요약된 명작을 읽고 뜻도 모르는 용어를 외우며 문장 기술을 배우고 있는 또래들과는 사뭇 다르다. 아람샘 교실에는 100여 명의 대기자가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그들을 위해 한 달에 한 번씩 특강을 해야 할 정도다. 분명 수요가 있는 것이다. 독서마저 입시도구로 전락한 어긋난 교육제도 속에서도 철학과 교양이 용해된 실천적 삶을 원하는 학생들이 분명 있는 것이다.

아람샘은 그들을 위해 3년 전 책방을 하나 냈다. '인디고 서원'이다. 그 흔한 베스트셀러나 참고서.학습교재는 팔지 않는다. 아람샘이 고르고 학생들과의 토론으로 검증된 책들뿐이다.

그러니 경제적 어려움은 쉽게 상상이 간다. 한 번 만드는 데 1000만원이 들어가는 격월간지 '인디고잉'도 아직은 크게 적자다. 하지만 아람샘은 포기할 생각이 없다. 자신의 일이 "'대안'이 아니라 훼손된 '본질'을 되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국 철학자 칼 포퍼는 "누군가 망쳐 놓을 수 있지만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길이 뭔지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고 했다. 이 땅에서 꺼져가는 참교육과 인문학의 불씨는 이념의 기치를 든 전교조 교사나 인문학 위기를 외쳐대는 노교수들이 아니라 한 가냘픈 여성 혁명가에 의해 지켜지고 있다.

이훈범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