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 협력업체 "억장이 무너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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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타를 벤치마킹하면 뭐합니까. 현대차(63,900원 0 0.0%)와의 협력이 선진화할 수록 오히려 손해만 커지고 있어요." 지난 12일 울산 남구에 위치한 현대자동차 협력업체인 A사 이모(55) 사장은 기가 막히다는 표정이었다. 이 사장은 이 날 오후 인터뷰 중 현대차 노조의 파업결의 소식을 듣자 울분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잔업, 특근 거부도 모자라 이젠 새해벽두부터 파업이랍니까? 아예 폐업을 하라고 하지요." 이 사장은 격앙돼 있었다. 현대차 노조의 잔업 특근거부로 A사 직원 30%를 임시 휴가조치한 상태에서 파업이 예고되자 "억장이 무너진다"는 얘기였다.

실제로 현대차 노조의 '성과금 투쟁'이 시작된 이후 A사 생산라인은 직격탄을 맞았다. 현대차가 최근 토요타를 벤치마킹해 JIT(Just In Time, 적기공급) 시스템을 구축하면서 재고관리가 엄격해지자 하청업체의 피해가 배가된 것이다.

토요타식 경영방식(TPS) 중 하나인 JIT는 협력업체가 부품공급의 재고관리를 책임지는 시스템이다. 하청업체가 재고부품의 관리를 도맡아 과잉 부품이 쌓이지 않도록 관리하는 선진화된 방식이지만 노조가 불시에 파업을 하게 되면 협력업체의 피해가 커질 수 밖에 없다.

◇노조 때문에 무용지물 된 토요타식 생산방식

생산이 원활하게 이뤄질 경우 JIT는 완성차 업체의 재고비용을 덜게 하고 협력업체의 부품과잉 생산을 막는다. 문제는 완성차 기업의 생산라인이 설 경우다. 현대차의 생산라인이 서면 이에 맞춰 생산을 하던 하청업체도 같이 선다. 이 시스템을 도입하기 전에는 하청업체가 생산을 예측해 파업과 무관하게 생산을 계속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렇게 대응을 할 수 없다.

이 때문에 A사는 하루치는 커녕 3 ̄4시간 작업량 이상의 재고를 만들 수 없다. 이 사장은 "대내외적으로 경영환경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구조, 재질, 공정개선을 통해 최근 4% 가량 단가를 인하했다"며 "하지만 이 마저도 생산량이 뒷받침되지 않아 날이 갈 수록 손해가 배가 되고 있다"고 토로했다.

문제는 또 있다. 현대차 노사가 합의해 생산을 재개할 경우다. 잔업 특근거부와 파업 등으로 빚어진 생산차질을 만회하기 위해 조립라인을 풀가동할 경우 협력업체는 실제로 '밤을 세워' 납기를 맞춰야 한다.

이 사장은 "완성차 조립이야 마음먹기에 따라 생산량을 올릴 수 있을 지 모르지만 중소기업은 다르다"며 "도대체 수십명 수준인 원청 노조 간부의 정치놀음에 왜 50만명의 애꿎은 협력업체 직원들이 희생돼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고개를 저었다.

이 사장은 대학을 졸업하고 이 중소기업에 입사해 20여년간 생산라인에서 일하며 직원들과 동고동락했다. 4년전 사장에 올라 누구보다 더 생산직 직원들의 고충을 이해하며 경영을 이끌고 있다. 하지만 최근 직원들을 '휴가조치'하면서 "밤잠을 이루지 못한다"고 했다.

◇'성과금'은 협력업체의 피와 땀..외국인근로자들 "일없어 청소만"

이날 오후 찾아간 D사의 사정은 더 심각했다. 이 회사 역시 JIT를 도입하기는 마찬가지. 수십명의 직원들을 휴가보낸 D사에서는 몇몇 직원들이 외국인 근로자들과 함께 '대청소'를 하고 있었다. D사는 현대차 1공장이 라인신설을 위해 공사에 돌입하고, 노조가 잔업 특근을 거부하면서 생산시설의 45%만 가동 중이었다.

박 모(48) 공장장은 "현대차 노조가 투쟁의 대상으로 삼은 '성과금'은 사실상 협력업체가 피땀어린 노력을 기울여 인하한 부품단가로 얻어진 이익"이라며 "우리는 현대차 노조와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임금은 3분의 1 수준이고, 이 마저도 감당이 안돼 외국인 근로자들을 도입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D사는 생산비 절감을 위해 최근 인도네시아 출신의 산업연수생 19명을 쓰고있다. 그러나 현대차 노조가 잔업 특근을 거부하면서 이들의 운용이 어려워졌다.

산업연수생 신분으로 기술을 배우기 위해 D사에 온 니코 샤티아니(28) 씨는 "1년간 한국어를 배우고 설레는 마음으로 이 회사에 왔지만 생산라인은 구경하지도 못했다"며 "며칠째 하는 일 없이 놀기도 어려워 동료들과 청소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 산업연수생들은 자신들이 왜 라인에 투입되지 못하는지 알지 못했다.

◇"파업해도 좋다. 이번엔 원칙지켜라"

강호갑 신영금속 사장은 "실명을 밝혀달라"며 매우 강경하게 얘기했다. 강 사장은 "다들 현대차 노조의 보복 등을 두려워해 이 같은 사안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꺼리지만 매번 고통을 당하다 보니 이제 그런 것도 두렵지 않다"며 원칙대응을 주장했다.

신영금속은 차체부품을 만드는 현대차 1차 협력업체. 강 사장에 따르면 연 2000억원 수준의 부품을 현대기아차에 납품하는 신영금속이 파업으로 인해 인해 입게 될 하루 매출손실은 8억원에 달한다.

강 사장은 "파업 규모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중에 협상을 해서 성과금으로 보상받을 노조와 달리 중소기업들의 피해는 막대하다"며 "지난해 현대차 노조의 정치파업 등으로 인해 입은 매출손실은 100억원에 달한다"고 밝혔다.

그는 협력업체의 피해가 심각하지만 쉴새없이 되풀이 되는 원청 노조의 파업에 "더 이상 억지요구를 들어줘서는 안된다"며 "이기적인 노조가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파업을 무기로 50만 협력업체 직원들의 눈물을 외면하는 행태는 더 이상 변칙적으로 용납돼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머니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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