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민주항쟁 가두 방송 전옥주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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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80년5월 광주민주항쟁 당시 가두 방송으로 광주시민들에게는 너무도 잘 알려진 전옥주씨(43)는 요즘 명지대생 강경대군 치사 사건 이후 무척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지난 12일에는 강군의 유해가 안치될 광주 망월동 묘역을 다녀왔고 기자와 만난 14일 저녁에는 다시 장례식준비가 한창인 세브란스병원 영안실로 달려가는 열정을 보이기도 했다. 『정치인들은 도대체 뭘 하는 사람들입니까. 꽃다운 젊음이 줄지어 산화하고 있는 판국에 비록 자결은 못할망정 왜 영안실에 가서 조문 한번 못합니까.』
88년2월 민화위 증언을 계기로 본격적인 사회활동을 펼쳐오고 있는 전씨는 최근 새로 출범한 신민당에 정식 입당, 왕성한 정치 활동도 전개하고 있다.
요즘 그가 열중하고 있는 것은 오히려 대학원 진학을 위한 시험준비다. 그는 금년 가을학기에 있을 경희대대학원(정치학) 야간부 입학을 앞두고 2년째 오전 2시까지 피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80년9월15일 포고령위반과 내란 음모죄 등으로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81년4월3일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풀려난 그는 그후 곧 상경, 지금의 남편인 이철규씨(41)와 만나 결혼, 슬하에 규원(10)·지원(7) 두 아들을 두고 서울 응봉동 30평짜리 현대아파트에서 전세 5천만원에 살고 있다.
연하의 남편 이씨와 만나 사글세방을 전전하며 포장마차와 의류행상을 해서 모은 돈으로 지난 1월 이곳에 정착한 그는5월20일자로 다시 보금자리를 광주로 옮길 계획이다.
하나는 생활비를 절약하기 위한 것이고 또 하나는 자신의 활동 근거지인 광주에 가서 본격적인 정치 기반을 닦기 위한 것이다.
서울에서 광역의회에 출마하라는 권유를 뿌리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 세월이 지난 지금『사이비가「광주」의 영웅으로 부각되고 있는 민심을 더 이상 눈뜨고는 볼 수 없다』며 분개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앞으로 4∼5년 동안 확실히 실력을 갖춘 뒤 국회 진출을 놓고 광주에서「사이비」와 일전을 불사할 방침이다.
『광주에는 지금 50여개나 되는 광주민주항쟁 관련 단체들이 있어요. 자기들과 생각이 조금이라도 다르면 무조건 적으로 매도하는 현실을 볼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은 아픔을 느낍니다. 이들이 하나로 통합될 수만 있다면 지금이라도 내한목숨 기꺼이 바치겠습니다.』 80년5월의 광주시민들은 참으로 용감했고 반공정신도 드높았다고 평가한 그는『아직도 난립해 있는 이들 단체들이 하나로 통합되는 것만이 5·18정신을 계승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강조했다.
핸드마이크를 들고 광주 시내를 누비며 시시각각 돌아가는 긴박한 대치 상황을 시민들에게 알려줌으로써 당시 광주시민들의 유일한 소식통이었던 그는 그러나 당시 자신의 이 같은 행위를 후회하기도 했다.
『내 방송을 듣고 거리로 쏟아져 나온 수많은 시민들이 희생당했으니 결과적으로 내가 그들을 죽음의 현장으로 끌어들이지 않았나 하는 죄책감 때문에 그후 몇년간은 심한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아버지가 경찰이었던 관계로 전남 보성경찰서 사택에서 대어난 그는 어릴적 춘화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그러다가 너무 자주 병치레한다며 할아버지가 춘심으로 개명, 호적에 올렸다. 지금도 그의 호적에는 춘심으로 올라있다. 지금의 옥주란 이름은 중학교 때부터 정착된 것인데 이번에 광주로 이사하며 다시 호적을 고칠 계획이라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이름이 많은데 80년 당시 나를 간첩으로 몰았던 수사관들은 내게「모란꽃」이라는 이름을 붙여주더군요. 내가 북에서「모란꽃」이라는 이름으로 간첩교육을 받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본의 아니게 네개의 이름을 갖게 됐습니다.』 지난80년대는 전옥주씨에게 그의 이름만큼이나 기구했던 것 같다. 80년「광주」의 아픔이 고스란히 그의 몸 구석구석에 상처로 남아있었다.
쇠파이프로 허리를 맞아 쓰러지면서 부러진 오른팔이며 예리한 송곳에 찔러 만신창이가 돼버린 무릎의 상처는 그래도 세월이 약이었을까.
11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아물지 않는 상처는 그런 육신의 고통이 아니라 여자로서 당해야 했던 치욕적인 고문이었다.
자신은 더이상「여자」일 수가 없게 돼버렸다며 치를 떠는 모습에서 분노를 넘어선 한 여자로서의 비애와 통한이 서려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80년 광주의 상처를 한 몸에 새겨둔 채「광주의 영웅」전옥주씨는 이제 그를 기다리는 「빛고을」사람들 곁으로 다시 돌아가려 하고 있다.【글 김준범 기자 사진 임영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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