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을 방관자로 보지말라(장두성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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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이미 3년넘어 집권해온 정권에 대해 새 모습을 보이라고 주문하는 것은 무리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강경대군 참사로 비롯된 이 난국을 수습할 수 있는 지름길은 급할때만 잠시 썼다가 사태가 조용해지면 벗어버리는 가면이 아닌 진실로 새로운 모습을 정부와 여당이 국민들에게 보여주는 것 외에 달리 없음이 분명해지고 있다.
지금까지의 시위양상을 보면 강군의 참사 그 자체가 일반국민들을 87년 6월때처럼 시위에 동조 또는 참가하도록 자극하고 있지는 않는 것 같다. 일부 대학교수들과 초·중·고교학교 교사,그리고 종교인들이 시국선언을 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대다수 국민들은 시위대와는 기본적으로 다른 동기에서 불만을 품고 있지만 이번 사태가 당정질서를 위협하고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는 정도로까지 격화되는 것을 현재로서는 바라고 있지 않음이 분명한 것 같다. 오히려 진저리를 치는 사람도 상당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강군참사가 6공정부의 정책방향과 능력에 대해 일반국민들이 쌓아온 불신과 불만을 새삼 되돌아보고 6공정부를 중간평가하는 계기를 마련해준 것은 분명하다.
이 잠재된 불신과 불만이 앞으로 어느 방향으로,또 어떤 강도로 움직이느냐에 따라 현 난국은 6공정권에 엄청난 위기를 몰고 올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집권자들은 시위대 대책이상으로 사회의 양극화 조짐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이에 따라 새 모습을 보여야 될 것이다.
정부와 여당이 새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는 우선 자세의 변화가 있어야 할 것이다. 당장 급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들이 대응해야할 상대는 시위대 보다는 일반국민이어야 한다.
노총리가 TV대담에 나와 취한 행동이나,소요가 가라앉은 다음에 시국수습책을 내놓겠다는 정부측 자세는 모두 난국의 대상을 잘못 잡고 있다.
여러 각도에서 이미 판정이 난 노총리의 TV대담 자세는 가장 상징적으로 시국에 대처하는 당국의 오만하기까지한 자세를 드러내 보였다. 연이은 분신자살과 시위와 시국선언으로 민심이 흉흉한 가운데 행정부의 수반이 TV토론에 나왔다면 일반 시청자들은 그의 입에서 시국안정을 향한 정부의 의지와 입장을 들으려 했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형식은 토론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강군사태 이래 정부대표가 처음으로 국민들을 대하는 기회였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시청자들의 기대는 안중에도 없는듯 시종 그 토론을 마치 재치경쟁처럼 이끌어 나갔다. 『어느 정부가 칼을 빼들고 사람을 찔러 죽이라고 하겠느냐』든가 『시간만 있으면 여기 앉은 모든 토론자의 말의 모순을 지적할 수 있다』는 식의 말은 그 토론의 성격상 그 자리에 있었던 토론자보다 시청자를 상대로 하는 것처럼 비칠 수 밖에 없지 않았는가. 그런 자세는 난국이 위기로 악화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정부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경박하고 무책임한 것이었다.
「민심수습」을 위한 조치는 시위가 가라앉은 다음에 내놓겠다는 정부·여당의 발상 또한 비슷한 자세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집권자들은 지금 도대체 국민을 대상으로 개혁을 하겠다는 것인가,시위자와 야당을 대상으로 흥정을 하겠다는 것인가. 그리고 국민을 그 흥정의 볼모쯤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인가. 시위가 끝나야 국민을 상대로 유화책을 쓰겠다는 것은 곧 그런 뜻이 아니고 무엇인가.
집권자들은 말하고 있다. 지금 수습책을 발표하면 그것은 시위대에 밀리는 것이다. 그러니 우선 정면돌파로 나갈 수 밖에 없다고. 그러나 그것은 오산이고 착각이다. 대상을 잘못 잡은 것이다. 그것은 박정권,전정권이 말기에 집착했던 바로 그 오도된 강공책이다. 지금 사태를 악화시킬수도 있고 완화시킬수도 있는 주체는 시위대가 아니라 시위대와 정부에 대해 비슷한 농도로 불만을 품고 있는 대다수 국민이다.
그리고 대다수 국민들이 품고 있는 불만은 많은 부분 시위대와는 일치하지 않고 있다. 보다 믿을 수 있는 정부,능력있는 지도층,그리고 물가를 비롯한 민생의 문제가 그 불만의 핵심부에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도 이런 불만을 해소하는 조치를 시위가 잠잠해진후에 내놓겠다면 정부는 누구를 위해 일 하느냐는 힐난을 자초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필자는 정부가 쇄신책을 내놓겠다면 빠를수록 좋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내용은 무엇보다 시위대나 야당보다도 일반 국민을 상좌에 올려놓는 겸허한 자세의 변화,한달도 안돼서 뒤집어 버리는 인기위주 정책결정 행태의 변화,그리고 이번 사태의 가장 근본적 원인으로 꼽히고 있는 강성·저돌성 인사의 교체 등이 큰 흐름을 이루어야 한다고 믿는다.
우리 정치는 집권층이 위기에 몰릴 때마다 「밀리면 안된다」는 「포위당한 수비대 멘틀리티」가 점점 선택의 폭을 좁혀 결국 파국으로 치달아온 전형을 보여왔다. 이번만은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는 민의는 아직 건재해 있다고 본다.
더이상 선택의 폭이 좁아지기 전에 집권자는 신축성 있는 위기관리의 용기와 지혜를 갖게 되기를 충심으로 바란다.<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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