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뜩한 현수막, 낯 뜨거운 광고물 도시 품격 떨어뜨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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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는 지난해 7월 24일부터 '권영걸 교수의 공공디자인 산책'을 연재해 왔습니다. 일상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시설물의 디자인을 보기 좋고 편리하게 바꿔보자는 취지였습니다. 아직도 우리 주변 곳곳에 눈과 정신을 어지럽히는 시설물이나 표현들이 널려 있습니다. 새해를 맞아 시급히 개선해야 할 주변 환경을 4회에 걸쳐 짚어봅니다.

공공장소에 살벌한 표현이 넘쳐납니다. 욕설에 가까운 과격한 표현이 담긴 현수막, 낯 뜨거운 광고물, 공포심과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공공표지판 등 다양합니다. 이로 인해 언어 자체가 파괴되고, 시민정서는 황폐해집니다.

공공장소에서 마주치는 거친 표현은 몇 가지 유형으로 나뉩니다.

'자폭하라' '피눈물 난다' '죽자'는 과격한 어투입니다. 비난의 메시지가 섬뜩한 느낌을 줍니다.

서울 시내 여러 곳에는 '사망사고 잦은 지점'이라는 교통 표지판이 있습니다. 국도변에는 '과속운전 사망사고 지점' '중앙선 침범 사망사고 지점' '음주운전 사망사고 지점'과 같은 더욱 구체적인 표지판이 버젓이 걸려 있습니다. 안전운전에 대한 주의를 환기하는 공공표지가 이렇게 살벌합니다.

인간을 상품화하는 광고도 있습니다. '동남아 처녀 후불제' '미녀 항시 대기'와 같은 선정적이고 반인권적인 표현들입니다.

셋째 유형은 언어 파괴입니다. 방가방가(반갑다), 추카추카(축하한다) 등 어법에도 맞지 않는 말들이 공공장소와 사이버공간을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이 같은 표현들은 인간정서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예일대 바프 교수는 특정 단어를 잠시 보는 것만으로도 인간의 사회적 행태가 변한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연구진은 사람들을 두 팀으로 나눠 각각 '무례한(rude)'과 '공손한(polite)'이라는 단어를 보여준 뒤 공격적 성향의 빈도를 관찰했습니다. '무례한'이란 단어를 본 팀이 상대방 이야기에 끼어들거나 공격적으로 행동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고 합니다. '공손한'이란 단어를 본 쪽보다 4배가 넘었답니다.

환경 훼손 논란도 있습니다. 살벌한 표현의 표지판은 눈에 잘 띄는 곳에 설치돼 있습니다. 한데 이런 불법 설치물들이 교통사고의 원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미국 밴더빌트대 연구팀은 실험 대상자들에게 수백 장의 사진을 빠른 속도로 보여줬습니다.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이미지를 본 직후, 사람들은 평범한 그림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걸 발견했습니다. 공공장소에 걸려 있는 자극적인 글과 이미지가 운전자와 보행자의 뇌에 오래 남아 다른 시각 정보를 인지하는 걸 방해한다는 겁니다.

한국공공디자인학회 회장 서울대 디자인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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