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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하영선칼럼

대선 주자들의 새해 구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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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김영삼.김대중.노무현. 한국 현대사가 최근 선택한 세 대통령이다. 세월이 흐른 뒤 대한민국 실록을 기록할 역사의 신은 세 대통령을 미래창조형이 아닌 과거청산형 대통령으로 기록할 것이다. 현대사의 지각생 대한민국은 지난 반세기 동안 근대국가 건설을 위한 안보국가.경제국가 건설에 전력투구했다. 역사의 우등생 소리를 들으면서 비로소 다시 무대에 설 수 있었다. 그러나 역사에는 공짜가 없다. 정치 억압, 경제 불평등, 사회 갈등의 부작용들이 심화됐다. 부작용 해결의 기대가 세 대통령을 탄생시켰다. 결과는 예상을 빗나갔다. 소박한 자주론은 국제정치적 소외의 위험성을 높이고 있다. 일방적 평화론은 한반도 평화에 크게 기여하지 못했다. 산술적 평등론은 성장의 정체와 함께 불평등의 심화라는 역설에 직면해 있다. 부작용 해결을 위한 노력이 결과적으로 새로운 부작용을 잉태한 것이다.

역사의 그네는 방향을 바꾸고 있다. 새로운 부작용의 등장은 새로운 대통령의 탄생을 부르고 있다. 과거청산형이 아닌 미래창조형의 대통령이다. 세 대통령도 미래를 얘기했다. 세계화, 정보화, 그리고 동북아 중심의 화려한 구호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구호로 끝났다. 세 대통령은 근대화의 부작용과 싸우느라고 미래 창조를 위한 사고와 정책을 준비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미래 창조를 위해 오랫동안 실천적 고민을 해 온 대통령을 키워야 할 때다. 그러려면 현재와 같은 운하 건설 공방의 수준을 하루빨리 벗어나야 한다. 정해년 첫날 대선주자들의 고민은 21세기 한반도 백년대계를 위해 풀어야 할 정말 큰 숙제는 무엇인가에서 출발해야 한다.

한국 경제의 재도약을 위한 세계 환경의 마련이 최급선무다. 자주와 동맹의 갈림길에서 번민하는 대통령은 21세기 한반도를 세계의 주인공으로 이끌어 갈 자격이 없다는 것은 현실이 증명하고 있다. 자주를 위한 과거청산을 하느라고 한.미 그리고 한.일 관계에는 적지 않은 금이 갔다. 깨지기 전에 미국과 일본을 보다 세련되게 활용하는 구상이 절실하다. 한.미.일 관계의 21세기적 복원과 더불어 날로 중요해지는 한.중 관계를 어떻게 관리해야 할지를 새롭게 고민해야 한다. 한마디로 네트워크적 사고를 할 줄 아는 대통령을 뽑아야 한다. 한국형 네트워크 구상의 초점은 한.미.일 그물망과 한.중 그물망을 어떻게 입체적으로 연결시키느냐에 있다. 그 위에 지구그물망과 사이버그물망을 연결할 줄 알아야 한다.

한반도 문제도 새로운 구상이 필요하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노래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남북 정상회담이 분단의 비극을 푸는 만병통치약이라는 환상도 깨졌다. 국민은 7000만이 잘사는 통일을 원하기 시작했다. 그 길은 하나다. 북한의 네트워크화다. 남북 통일은 그중의 작은 부분이다. 북한이 지구상의 모든 주인공과 통하는 속에서 한국과 통하는 길이 북한도 살고 한국도 사는 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북한의 수령 체제가 핵 선군주의(先軍主義)에서 비핵 개혁개방주의로 변환할 수 있는 방향으로 대북 포용정책을 새롭게 추진해야 한다.

새해를 맞이하는 국민의 피부에 와 닿는 고민은 말할 것도 없이 경제와 교육이다. 빈부 불평등과 교육 격차의 부작용을 구시대적 발상으로 풀려는 정부의 노력은 역설적으로 경제성장 동력의 상실과 교육의 하향평준화라는 더 큰 부작용을 낳고 있다. 정치는 종교와 달라 동기로서 평가받는 것이 아니라 결과로서 평가받는 비정한 세계다. 한국현대사의 부작용을 푸는 노력이 더 큰 부작용을 낳지 않는 새로운 구상과 정책이 새 대통령이 져야 할 역사의 멍에다.

한풀이의 대통령은 노무현 시대로 마감해야 한다. 남들이 새로운 목표를 향해 앞을 보고 질주하는 21세기의 세계무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한풀이에서 미래풀이로의 역사적 대전환을 모색해야 한다. 국민이 타고 있는 역사의 그네는 이미 그 방향으로 가고 있다. 문제는 이 땅의 정치인들이다. 차기 대통령을 꿈꾸는 주자들은 새해 벽두에 자신이 어디로 뛰고 있는가를 다시 한번 고민해야 한다.

하영선 서울대 교수·국제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