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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포럼

노무현 대통령이 무섭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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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국군 통수권자이고, 헌법 수호자인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최고 지도자고 어른이다. 국민을 보살필 책무가 있다. 한데 요즘 대한민국에선 거꾸로 "우리가 노 대통령을 보살피자"는 말이 나온다. '노사모'가 아닌 사람들이 그렇게 말한다. 한나라당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는 26일 "노 대통령이 애정 결핍증으로 힘들어 하고 있다"며 "어떻게든 국정이 파탄 나지 않도록 대통령에게 힘과 의욕을 북돋아 주자"고 말했다. 잘한 일을 찾아서 칭찬해 주자는 것이다.

이장규 중앙일보 시사미디어 대표는 12월 27일자 칼럼에서 "노 대통령의 막말에 국민들이 좀 둔해질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선거의 해가 시작되고 레임덕 현상이 갈수록 심해질수록 대통령은 오기로라도 '노무현식 독재'를 밀고 나갈 것이니 "가급적 대통령을 화나게 하지 말자"고 말했다.

두 사람의 지적에 동의한다. 21일 평통자문회의 발언 이후 노 대통령의 언행을 보면 그는 상처 받고, 외롭고 그래서 분노하는 것 같다. 상황이 이렇게 된 건 전적으로 자기 책임이다. 누굴 탓할 순 없다. 노 대통령은 이미 위로 받기엔 너무 높은 자리에 올라 있고 연세도 적지 않다. 그래도 위로하자.

혹시 노 대통령의 분노에 또 다른 배경이 있진 않은지 의심이 간다. 권력 우울증 말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산모들 중 상당수는 우울 증세를 보인다고 한다. "도대체 애 잘 낳고 왜 우울하냐"고 말하면 무식하다는 말 듣는다. 중앙일보 황세희 의학 전문기자는 "산모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목표를 달성하고 나면 허탈감을 경험한다"고 말한다. 고3 아이를 명문대에 합격시킨 뒤 엄마가 우울증에 빠지기도 하고, 꼬박꼬박 돈 모아 집을 사거나 몸 바쳐 일한 직장에서 승진한 뒤 병이 생기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성공우울증(success depression)이라고 한다.

자수성가한 노 대통령은 말 그대로 큰 목표를 성취했다. 하지만 허탈감도 그에 비례해 클 것이다. 임기는 끝나가고, 이뤄 놓은 건 없는 것 같고, 역사로부터 평가 받을 것이라고 자위하지만 그 반대가 될지도 모른다는 겁도 나고, 그럴 것이다. 하지만 보통 사람에게 최고 권력을 주고 때가 되면 고독하게 만드는 게 바로 민주주의다.

노 대통령에게 한 인물을 소개하고 싶다. 나이도 비슷한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이다. 그는 르윈스키 스캔들로 세계적인 망신을 당했다. 백악관에서 경호원들을 밀실 밖에 세워둔 채 딸 또래의 인턴 르윈스키와 성관계를 맺었다. 지지도는 추락했고, 탄핵 일보 직전에 살아남았다. 친구인 고어 부통령마저 그와 거리를 뒀다. 임기만 끝나면 부인 힐러리가 이혼을 요구할 것이란 소문도 파다해 사면초가였다. 클린턴은 그 고독의 시간을 미친 듯이 일을 하며 때웠다. 2000년 10월 미 언론은 "이집트 중동평화 회담에 참석한 클린턴은 28시간 동안 2시간30분만 잤다. 임기 말인데도 쉴 새 없이 일한다. 그는 정력의 사나이다"고 보도했다. 추락했던 클린턴의 지지도는 신기하게도 임기 말에 70%까지 올라갔다.

노 대통령도 남은 1년을 바쁘게 보냈으면 좋겠다. 정치는 손 떼고 지금까지 벌여놓은 일 마무리하면서 바빴으면 좋겠다. 보수세력을 쓸어버리지 않아도, 정권을 재창출하지 않아도, 역사를 내 뜻대로 다시 쓰지 않아도, 세상은 돌아가고 사람들은 살아간다.

내년 이맘때면 후임 대통령이 뽑혔을 것이다. 노 대통령은 정말로 짐을 싸는 중일 것이다. 그때 "초중반에 헤맸지만 막판엔 열심히 일했다"는 평가를 받길 바란다. 국민이 대통령을 두렵게 느끼는 상황도 올해로 끝났으면 좋겠다.

김종혁 정책사회 데스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