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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 아트」의 기수 미 앤디 워홀|사후 4년 재조명 활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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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60년대 초 미국을 중심으로 일어나 전세계를 풍미했던 팝 아트의 기수 앤디 워홀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가 나오는 등 그가 죽은지 4년만에 그에 대한 평가 작업이 새롭게 일고 있다.
척 워크먼이 제작한 『슈퍼스타』란 영화도 그중 하나다.
팝 아트는 난해해져 가는 현대미술에 반기를 들고 대중에게 친숙한 만화나 광고, 콜라병 같은 사물, 마를린 먼로, 엘비스 프레슬리 같은 대중의 우상들을 소재로 대중에 접근을 시도한 미술 사조.
팝아트는 현대 도시 생활의 일상적인 사물에서 소재를 찾고 있다. 그러므로 팝아트는 보는 사람의 시각을 자극할 수 있는 「극 사실적」 사물로 가득 차있다.
앤디 워홀은 이 팝아트 미술 사조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작가. 특히 그가 실크 스크린으로 여러개의 얼굴을 병렬시켜 독특한 효과를 빚어낸 작품 『마릴린 먼로』는 팝아트를 소개하는 글에는 빠지지 않고 소개될 정도로 유명하다.
앤디 워홀은 대중에게 친숙한 소재로 작품 세계를 펼쳐갔지만 그의 삶과 죽음은 대중에게 호기심을 주기에 충분하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서 어떤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을 철저하게 거부했으며, 심지어 비평가들에 대해 자신을 변호하라는 주위의 요구에도『그럴 수는 없다. 그들이 옳다』라고만 대답하는 냉소적 자세를 취했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 관한 질문을 받으면 아무런 성의나 확신 없이 『그렇다』고 대답했는데, 이 대답은 그에게 있어서는 『아니다』는 대답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대답이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후기 산업 사회에서 대량 생산·소비·복제되는 여타의 상품과 다른 특별한 위치를 부여하지 않았다.
이런 예술관에도 불구하고 그가 1987년2월22일 뉴욕 대학병원에서 타계한 후 한달만에 작품 값이 7배로 뛰는 등 「앤디 워홀 붐」을 일으키며 누구보다도 독특하고 비싼 작가로 되었다.
시실 그의 죽음도 상당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정확한 나이도 불명인 채 58세로 통용되었고 사인도 에이즈라느니, 병원 측의 실수로 인한 의료사고였다느니 하는 소문이 무성했다.
워홀은 1962년 로스앤젤레스에서 가진 첫 개인전에서 수프 깡통 그림으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이후로 그는 실크스크린 기법을 이용, 사진 이미지를 캔버스에 전사한 대중 연예인의 그림으로 명성을 떨쳤다.
그의 그림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으로 나뉜다.
『우습지도 않은 농담의 되풀이』라는 경멸이 있는가 하면 『우리가 매일 접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시각적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사물을 재인식하게끔 한다』는 호평도 있다.
영화 『슈퍼스타』의 제작자 워크먼은 심연처럼 불명료하기만 한 워홀의 삶을 조명하고자 했다.
그러나 비평가들은 이 영화가 워홀의 삶을 제대로 드러내는데 실패했다고 평하고 있다.
워크먼은 워홀의 친구·친척·형제·사촌 등 주변 인물로부터 자료를 수집했지만 이들도 워홀에 대해 그다지 깊은 정보를 갖고 있지 못해 워홀의 삶을 명확하게 재구성한다는 영화의 의도가 제대로 살려지지 않았다는게 이들의 비판.
워홀이 자신의 사생활을 워낙 드러내지 않은 탓으로 영화는 워홀 자신보다도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 약물 사용, 주변 인물들에 오히려 더 충실하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리즈 테일러의 손가락에 끼어진 커다란 반지로 환생하는 것도 멋진 일』이라고 얘기했던 다소 괴팍하면서도 신비로운 이 예술가의 삶이 대중에게 제대로 재구성되기는 어쩌면 영원히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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