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중견기업] 대유 - '알토란 섬유회사' IT로 변신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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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섬유제품을 만드는 대유의 이종훈(38.사진) 사장은 이번 크리스마스를 방글라데시에서 보냈다. 그는 1994년 이후 한 번도 가족과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낸 적이 없다. 90년대 생산시설을 중국과 방글라데시로 옮기면서부터 연말을 주로 해외에서 보낸다. 대유란 상호가 지금은 낯설지만 70~80년대에는 꽤 이름난 섬유수출 업체였다. 대유의 전신은 마산방직. 처음엔 일제시대 일본인이 운영하던 회사였다. 해방 후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었다가 68년 대유증권 이준영 사장(현 대유 회장)이 사들였다. 이후 사세는 몰라보게 커졌다. 국내 섬유산업이 힘을 내던 80년대 후반 이 회사의 매출은 400억원을 넘었다. 대유는 석유화학 제품으로 실을 만들고 그 실로 스웨터.양말을 생산한다.

이 회장의 손자인 이 사장은 92년 선친인 이상은 회장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뜨자 당시 스물다섯의 나이로 경영에 참여했다. 국내 섬유산업이 경쟁력이 떨어져 업체마다 해외 탈출을 서두르던 때였다. 대유 역시 80년대 후반부터 자메이카.인도네시아 등으로 일부 생산라인을 이전했다. 그러나 현지 합작파트너와 갈등을 빚는 등 여러 이유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큰 손해를 봤다. 그래도 해외 이전은 대세였다. 92년 중국과 수교가 이뤄지자 대유는 중국행을 서둘렀다. 이 사장은 "동대문 시장에서 산 스웨터의 원가를 분석해보니 중국산과 가격 경쟁이 불가능한 상태였다"고 기억했다. 둥지를 튼 곳은 쑤저우. 700만 달러를 투자해 마산 양덕동 공장을 통째로 뜯어 옮겼다. 대유는 이어 방글라데시로 갔다. 극빈국인 방글라데시에서 만든 제품은 유럽에서 관세혜택을 받는데다 수출쿼터 제약도 받지 않았다. 그는 "폭우가 쏟아지던 어느 날 밤 애써 옮긴 기계가 물에 잠길까봐 너나없이 뛰어나와 물을 퍼내던 직원들의 열정을 보면서 제조업의 역할을 다시금 깨달았다"고 회고했다.

새 세상에서 뿌리를 막 내릴 무렵 외환위기가 닥쳤다. 고합.한일합섬.금강화섬.갑을방적 등 내로라하는 섬유 대기업들이 쓰러졌고 대유의 경영도 어려웠다. 특히 계열사의 경영은 말이 아니었다. 98년 7월 대표이사를 맡은 이 사장은 증권사를 팔기로 결심했다. 많은 사람들이 "돈 되는 증권을 버리고 사양산업인 섬유를 잡느냐"며 의아해 했지만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땀흘린 만큼 결과를 얻는 제조업이 좋다." 매각 대금(350억원)으로 부채를 갚은 이 사장은 방글라데시 공장 정상화에 매달렸다. 좋은 품질의 실과 스웨터를 만드니 유럽 수출량이 늘었다. 대유방글라데시는 2000여명의 직원을 두고 3500만 달러의 매출을 올리는 회사로 자랐다. 대유의 주력 사업장이 된 것이다. 대유의 변신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인력과 장비를 계속 줄여온 청주공장을 곧 정리하고 서울 삼성동의 사옥도 팔았다. 구조조정을 여러차례 하다보니 한 때 300여 명에 이르던 대유의 한국인 직원규모는 현재 50명 정도로 줄었다. 이 사장은 "2년 전 '오래 남아 사장께 부담을 줬다'며 떠나는 고참 부장의 말을 들으며 많이 울었다. 떠난 사람들도 '저 회사가 내가 다니던 회사'라며 뿌듯하게 생각 할 회사로 키우겠다"고 다짐했다.

이 사장은 올해 반도체 전공정 장비를 생산하는 피에스티라는 벤처기업을 인수하는 등 해 정보기술(IT) 분야로 사업다각화를 추진중이다. 대유는 92년 무선호출사업자 선정 경쟁에 뛰어 들었었고 2000년에 초고속 모뎀 생산업체인 트리쯔를 인수하는 등 오래전부터 IT사업의 문을 두드렸다. 이 사장은 "앞으로 첨단 제조업과 부동산 개발분야 등으로 사업 영역을 넓힐 것"이라며 "2007년은 대유 재창업의 원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글=임장혁 기자<jhim@joongang.co.kr>
사진=김형수 기자 <kimh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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