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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사 10년 만에 후배" 공장이 늙어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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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경기도 화성에 있는 대기업 계열 엔진부품 업체 H사의 강모(38) 과장은 최근 입사 10년 만에 후배를 받았다. 회사가 10년 가까이 생산직 신입사원을 뽑지 않은 탓이다. 강씨는 "신입사원과 격차가 너무 커서 어떻게 기술을 전수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처럼 대기업 생산현장에는 10년차가 넘는 막내들이 수두룩하다.

대기업 관계자들은 "노동시장 유연성이 떨어지고, 노조가 워낙 강해 정년연장을 주장하는 터라 청년 인력에 대한 신규 채용이 어렵다"고 말한다. 삼성중공업이 최근 생산직 600명을 신규 채용한다는 공고를 내자 9000여 명이 지원해 평균경쟁률이 15대1에 달했다. 수도권에 있는 K공고 졸업반인 이모군은 "대기업에 들어갈 수 있다면 대학진학을 포기하겠다"며 "중소기업은 발전 가능성이 작아 가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외환위기 이후 대기업들이 생산직 신규 채용을 중단하다시피 하면서 예비 엔지니어들에게 대기업은 '그림의 떡'이 됐다. 군자공고의 손호일 교사는 "10년 전만 해도 대기업들이 인력모집 공문을 보내곤 했는데 지금은 한 건도 없다"며 "이런 상태에서 공고생들의 70% 이상이 대학에 진학하는 것을 말릴 수 없다"고 말했다. 이 와중에 중소기업들은 청년 인력 구인난에 시달리고 있다.

경기도 반월공단에 있는 한 중소 전자부품 업체 노무담당자인 안모씨는 지난달 내내 전국 공업고등학교를 찾아다니며, 사람을 추천해 달라고 사정을 했다. "회사 실적과 정경이 담긴 사진을 내보이며 믿어달라고 해도 교사들의 반응이 썰렁하다"는 게 안씨의 하소연이다. 공고 졸업생의 70~80%가 대학에 진학하다 보니 취업 희망 인력풀이 적어진 상황에서 추천해 달라는 중소업체들은 많아 학교들이 기업을 가린다는 것이다.

"우리는 맞으면서 기술을 배웠는데, 요즘 젊은 친구들한테는 형처럼 다정하게 가르쳐야 한다." 이 회사 작업반장 김모씨의 말이다. 안씨는 "공고 출신 실습생에게 언성을 높였다가 학생이 학교에 일러 큰 곤욕을 치른 적이 있다"며 "학교에서 앞으로 학생을 추천해주지 않겠다고 해서 달려가서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고 말했다.

인천시 고잔동 남동공단에서 전기밥솥 관련 부품을 만드는 Y업체 생산직원 40여 명의 평균연령은 45세다. 캄보디아에서 온 외국인 산업연수생을 제외하곤 36세 남자 직원이 막내다. 그동안 이 회사에도 공고나 전문대를 갓 졸업한 젊은 구직자가 적지 않게 다녀갔지만 1년을 넘기지 못했다. 이 회사 김 모(60) 사장은 "공단 내에서도 정보기술(IT) 기업엔 젊은 사람이 있지만 우리 같은 기계류 제조공장은 썰렁하다"고 말했다. 한 50대 직원은 "우리가 늙어 일할 수 없게 되는 때가 공장 문을 닫을 때"라며 자조적으로 말했다.

올해 초 취업포털 커리어가 기업회원 586개사를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사원 채용에 어려움을 겪은 적이 있다'는 곳이 75.6%(443개사)였다. '가장 어려운 직종'으론 '생산기술직'이란 응답이 22.1%(98개사)로 가장 많았다. 업계에선 이대로 가다가는 5~10년 뒤에는 생산부문 경쟁력이 바닥으로 떨어질 것이라며 한숨소리가 나온다. 1995년 생산현장 인력의 31.6%를 차지했던 29세 이하 청년 인구는 2005년 21.7%로 줄었다. 생산현장 고령화의 여파로 대기업에선 구직난이, 중소기업에선 구인난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세계 최고의 대학진학률(87.5%.2006년)과 대졸자들의 생산직 기피도 '청년 인력 공동화'의 한 원인으로 꼽힌다. 공고 예비 엔지니어들이 대거 대학에 들어가고 졸업 후에는 생산직을 기피하는 현상도 만연해 있다. 경기도 군포의 한 모니터 제조 대기업에 다니는 심모(29)씨의 경우 지난해 입사한 360명 중 유일하게 '생산직 엔지니어'를 지원했다. 90% 가까운 공대 출신들은 대부분 연구직이나 재무.경영.기획 쪽을 지원했다. 김씨는 "야근.주말근무 수당을 합치면 엔지니어의 월급이 1.5배 정도 많지만 일이 힘들고 남에게 내세우기 어려워 기피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취직을 준비 중인 서울 K대 공대 한모(26)씨는 "공대생들조차 타과 복수전공을 하며, 경영.관리직을 지원하는 추세"라고 말했다.

양선희.나현철.김필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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