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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9세기 러시아 정신의 혼돈 투시|도스토예프키의『악령』|김병익<문학평론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0면

1869년 모스크바 대학생들 사이에 친구 한 사람을 죽이고 그 서체를 연못 속에 던져 버린 끔찍한 살인사건이 폭로되었다. 체제 전복을 목적으로 하는 5명의「광신적 혁명주의자」그룹 중 한 명인 이바노프가 그 신념이 약화되어 배신, 고발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생기자 다른 네 사람이 살해한 것이었다. 사건이 발각되면서 다른 세 사람은 체포되어 이듬해 재판에 회부되었고 주모자 네차예프는 서유럽으로 도주해 버렸다.
대작『백치」를 마치고 새로운 작품을 구상하고 있던 도스토예프스키는 드레스덴에서 이른바 이「네차예프 사건」소식을 모스크바 대학에 다니는 처남으로부터 들었다. 청년시절 진보적인 독서클럽인 페트라셰프스키 서클에 가입했다가 시베리아로 4년 동안 유배된 적이 있었지만 이미 러시아 정교주의자가 되어 이즈음에는 인간의 구원 문제와 씨름하고 있던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사건전말에 큰「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오늘의 정세에 절박한 것으로 가장 중대한 문체와 직접 관련된 것」을 주제로 한 소설을 쓰기로 했다.
집필에서 어느 때보다 가장 고심해야 했던 그 신작은 1871∼2년에 걸쳐 발표되었고 그것이 그의 후기의 거대한 4부 작 중 세 번째인『악령』이다. 이 작품은 복잡한 줄거리, 현실과 영혼, 역사와 문명에 대한 도스토예프스키 특유의 사변과 대학로 엮여 있지만 우리는 여기에 등장하는 중요한 인물들을 통해 이 작품의 성격을 이해해 볼 수 있을 것이다.
19세기 중반 러시아가 처하고 있던 엄청난 정신적 소용돌이의 지형도를 그리고 있는 이 소설은 주인공 스타브로긴을 인성의 극과 극이 함께 뒤섞인 매우 복잡한 인물로 설정하고 있다. 귀족가문 출신의 이 미남 청년은 서구에 유학하기도 하고 동양까지 여행하여 학문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많은 편력을 해 왔음에도, 뛰어난 이성을 갖춘 동시에 야수적인 폭력에 휘말리기도 하며, 조야한가 하면 극히 고귀한 품성을 지니고 있고, 극도의 허무주의에 빠지면서도 영혼의 구원을 갈망한다. 종교와 윤리, 지성과 정치 등 모든 측면에서 극단들이 혼돈 스럽게 뒤섞여 있는 그는『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드리트미와 이반, 알료샤와 스메르자 코프 등 네 형제를 다 섞은, 말하자면「신과 포옹하는 악마」의 모습이며, 그 혼돈의 귀결은 스스로 목을 밧줄에 매는 것이었다.
이 스타브로긴은 중심점으로 하여『악령』은 네 사람의 지적 모형을 상하좌우의 축으로 포진시킨다. 우선 스테판 베르호벤스키. 늙은 자유주의 학자인 그는 스타브로긴의 가정교사로 그를 회의적인 현대주의자로 교육시키는데, 이때만 해도 자유주의란 허무주의와 엇비슷한,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가 보기에 타락한 문명으로서의 서구주의 적 지향을 가지고 있었다.「신념으로보다 허영으로」자유주의 사상을 전도하는 그는 그래서 무능하고 속물적이며 풍자적이기도 하고, 그래서 보수적이며 온건한 양식의 소유자로서, 역사학자 E H 카는 도스로예프스키가 혐오한 투르게네프를 모델로 한 것으로 보고 있다.
스테판의 반대극점에 인격적으로는 더없이 선량하지만 스타브로긴의 정신적 허무주의를 철학적으로 이념화한 키릴로프가 있다. 그는 신이 죽었기 때문에 새로운 신, 곧「인신」이 출현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신이 준 목숨을 자의로 처분할 수 있는데서 가능하다고 보았다. 자신의 철학에 따라 자살하게 되는 키릴로프는 니체의 차라투슈트라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설명되는데, 소설에서 이 치열한 허무주의자는 스타브로긴의 영향을 가장 직접적으로 받으면서 그를 새로운「인신」적 인물로 존경한다.
스타브로긴의 왼쪽에 스테판의 아들이며 열렬한 사회주의자인 표트르 베르호벤스키가 활동한다. 명백히 네차예프를 모델로 한 그는 자신이 설정한 혁명의 목적을 위해 어떤 반윤리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는 냉철하면서도 열정적이고, 이상주의적이면서 교활한 인물이다. 그는 스타브로긴을 새로운 세계의 지도자로 추대하면서 급진적 음모를 주도하고 그래서는 동지를 죽이고 그 혐의를 자살하려는 키릴로프에게 씌우도록 한다.
마지막으로 스타브로긴의 반대편에 서서, 그에 의해 살해되는 샤토프가 있다. 카라마조프가의 알료샤와 함께 도스토예프스키가 가장 이상적 인물로 추구하는 인간형인 그는 한때 표트르의 사회주의 그룹에 참여했지만, 그러나 러시아 정교회의 민족주의적 신앙을 통해서만 현대의 타락에서 구제될 수 있다고 개심하고 자기 아내를 유린한 스타브로긴 이야말로, 그럼에도, 민족 구원의 지도자가 되리라고 열망하고 있었다. 천성이 고귀하고 사랑이 충만해 있는 그는 아내가 낳은 스타브로긴의 아이를 받아 들고 더 없는 희열에 차 있는 순간 표트르에게 잔인하게 살해되고 만다.
중요한 인물들 거의가 자살하거나 피살되는 이 소설은 비극적이다. 그러나 이 비극은 전통과 현대가 갈리는 그 격동의 시기에 자신의 시대와 열정적으로 싸운 지식인들이 끝내 부닥치지 않을 수 없는 잔혹한 역사의 운명에 의해 빚어진 비극이다.「도덕적 악과 정치적 허무주의는 근본적으로 동일」한 것이라고 본 도스토예프스키의 이 정치소설은 19세기 후반의 러시아에서 뿐만이 아니라 1세기 후의 바로 오늘의 역사에서도 보이는 우리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는 스테판의 환상을 통해 이러한 현대의 정치적 인간들의 정황을「귀신들린 돼지들이 호수로 뛰어드는」성서의 우의로 비유하고 있다.
나는 이 소설을 근 30년 전 전방의 사병으로 근무하면서 시인 황동규에게 빌린 영역 판으로 틈틈이, 그러나 무척 아껴 가며 읽었다. 그때『백치』와 김은국의『순교 음」를 잇따라 읽었는데,『악령』을 읽을 때의 그 고통스러움은 지금껏 잊혀지지 않는다. 그것이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1985년 내 책 하나를 묶으면서『들린 시대의 문학』이라고 제목을 정하고 서문에 이 소설을 인용할 정도였다. 그때, 그리고, 지금도 도스토예프스키의 이 대작은 그의 어느 다른 작품보다 실감나게 우리 앞의 현실로 살아 있다고 생각 키웠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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