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총리·경제수석 배출 "창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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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우리나라 경제성장사의 이론적 주역이었던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창립 20주년을 맞았다. 경제문제에 관한 조사·연구가 거의 황무지에 가까웠던 초기에 KDI의 왕성한 활동은 정부정책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런만큼 KDI를 이끌어 가는「원장」자리도 뉴스의 각광을 받았다. 또 부처 할거주의나 연구기관을「사용화」하려는 정부의도 등으로 원장과 경제관료들과의 사이에 끈끈한 관계, 때로는 긴장상태가 지속되는 기간도 있었다.
이제는 시대상황이 달라지고 경제의 큰 흐름도 바뀌었을 뿐만 아니라 경제부처나 민간부문에도 꽤나 많은 전문가들이 포진하고 있을 만큼 세상도 많이 변했다.
KDI도 스스로 새 옷을 입고 국제화시대에 걸맞은 정책연구와 비판기능이 강화되어야 한다는 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KDI하면 곧「김만제원장」이 떠오를 만큼 KDI발전과 금씨와의 관계는 뿌리가 깊다. 그가 초대 원장으로 부임한 이후 거의 11년에 가깝게 주요경제정책을 주물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연구자로서 최대한창의력도 발휘했고 그의 독특한 개성으로 정부 각 부처와의 마찰도 줄이면서 일을 처리했기 때문이다.

<해외두뇌 적극영입>
KDI의 태동은 5·16혁명이후 곧장 경제개발계획에 손댔던 군사정권의 전문가집단 필요성에 의해 나타난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1, 2차 경제개발계획이 거의 외국학자들의 손에 맡겨진데다 그 내용도 마음에 들지 않아 70년 KDI설치 관계법을 만들었다.
그러나 초대 원장에 누구를 앉히느냐가 문제였다. 당시 김학렬 부총리는 서강대 부교수로 있던 김만제씨를 적임자로 생각했으나 김 교수의 나이가 37세로 너무 젊어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 날 박대통령은 원장이 될 적임자를 천거하라고 재촉했다.
김 교수 이야기가 나오자마자『나이가 무슨 상관이냐. 능력이 문제지』라는 박대통령의 OK사인이 떨어지면서 김만제 원장 시대가 개막되었다.
그는 64년 미 미주리 대에서「유러달러 분석」이라는 논문으로 학위를 받은 후 주한미국경제 개발 처(USAID)의 경제담당고문으로 있다 서강대부교수로 자리를 옮겼었다. 김교수는 USAID에 있을 때 2차 경제계획 모형을 작성하고 계량경제학을 도입해 실제 경제정책에 어떻게 응용할 수 있는가를 보여줌으로써 당시 경제관료들의 눈길을 끌었다.
71년에 출범한 KDI의 초대원장이 된 김만제씨는 해외 두뇌를 모으는게 급선무였다. KDI의 설립자인 박정희 대통령의 관심도 보통이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선 연구를 시작하려면 고국에서「웅지」를 펼 만한 인물들을 찾아 나서야 했다. 72년 김원장의 미국 순방여행은 바로 인물탐색전이었다.
그때 영입된 사람들이 김적교(현대 외 경제정책연구원장), 구본호(현KDI원장), 김대영(전 건설부 차관), 홍원탁(서울대 교수) 송병낙(서울대 교수)씨 등 12명이었다. 당시에는 이들이 김만제원장의「12제자」로 불렸다.
서울 문리대 정치과를 나와 미 미네소타대학에서 경제학박사학위를 받은 구본호씨를 부원장으로, 김적교씨와 공기업분야 전문가인 사공일씨(전 재무부장관)등을 연구위원으로 앉혔으며 몇 년 후에는 당시 신민당 최고위원 이충환씨의 아들 이규억 박사를 연구위원으로 맞았다.
이들 대부분은 귀국해 아파트뿐만 아니라 2인1대 꼴로 승용차가 나오는 등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다.
김 원장은 재임중반까지 정부의 성장 우선 정책을 뒷받침하는데 주력했다. 4차 경제개발계획부터는 KDI의 기여가 컸다.
인구정책·사회지표개발 및 정부투자에 대한 타당성분석등 각종 개발계획에 직·간접으로 참여했다.
당시 정부 쪽에서는 같은 서강대교수출신의 남덕우 부총리가 있어 같이 호흡을 맞춰 이른바 서강학파를 이루면서 KDI 황금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경제정책을 둘러싸고KDI가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는 역할이 결국「정부시녀」 가 아니고 뭐냐는 비판도 없지 않았다.
74년1·14대통령긴급조치나 국민복지연금제도 입안 등에도 KDI가 간여했으며 정부요청으로 방위세 신설방안도 마련했다. 그후에는 8·3긴급조치와 물가억제 방안의 대강을 준비해 정부에 제출했다.
그 같은 정책들의 실효는 당초의 기대에는 모자랐다. 그러나 김 원장이 정책개혁을 위해 나름대로 학자적인 이성의 소리를 담아 정책 실시과정에서 발생할 문제점들을 지적했다는 후문도 있었다.
제1차 세계석유파동이 일어났던 지난 74년 이후에는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실업률을 최소화하고 성장률을 높이는데 KDI의 자문이 많은 도움이 됐다고 당시의 경제정책 관계자들은 말하고 있다.
KDI는 81년 하반기정책협의회에서 추곡수매가 동결 안을 들고 나와 야당과 농민들로부터 심한 반발을 샀다.
김 원장은 그 같은 비판도 듣지 못한 척 경제부처 사무관들과도 일일이 만나 대화를 나누고 겸손하게 처신해 재임기간 중 기획원과의 마찰도 거의 없었다.
한때는 이봉서 현상공부장관이 부원장으로 김 원장과 팀을 이뤄 일한 적도 있으며 이승윤 전 부총리도 KDI에 머무른 적이 있다.
5공으로 접어들면서 정부경제정책이 성장에서 안정으로 방향을 틀었다.
82년1월 김 원장은 10년10개월만에 물러나게 된다.


2대 원장에는 당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던 고 김재익 경제수석과 흐름을 같이 하던 김기환 당시 금융통화운영위원이 임명된다.
그는 전두환씨가 국보위 상임위원장시절 김재익·박봉환씨와 함께 경제가정교사를 했었다. 금재익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은 안정과 개방시책을 강력히 밀고 나가면서 개방 론 자인 김기환씨가 필요했다.
이 같은 요구에 부응, 김기환씨는 취임하자마자 적극적으로 개방 론을 폈다. 또 국제개발교류센터(IDEP)를 설립, 후 발 개도국에 우리의 개발 경험을 전수해 주는 등 국제화에 앞장섰다.
워싱턴에는 미국인으로만 구성된 한국경제연구원(KEI)을 설립, 우리경제의 홍보를 미국사람에게 맡겼다.
83년에는 경제부처 및 KDI와 KIET(한국산업경제기술연구원·현 산업연구원의 전신)사이에 격심한 정책대결이 벌어져 경제계의 화제가 됐다.
기획원 산하 기관인 KDI는 전 품목에 대한 순차적인 수입자유화를 주장했으며 상공부산하기관인 KIET는 아직은 시기상조라며 이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KDI 이론에는 기획원뿐만 아니라 당시, 강경식 재무부장관과 이진설 차관보(현 건설부장관), 이형구 차관보(현 산업은행총재)까지 지원에 나섰다.
국내산업의 보호 벽 역할을 자임하고 있었던 당시 김동휘 상공부장관은 화가 치민 나머지대결에 나섰으며 그때까지 대리전정을 치르고 있었던 KDI와 KIET를 제쳐놓고 김동휘 대 강경식 양 장관의 정책논쟁이 벌어졌다.
수입자유화 논쟁은 과천공무원교육원에서 두 장관이 강의형대로 설전을 벌여 절정을 이루었다.

<개방정책 적극추진>
아웅산 사건 후 있은 개각에서 김기환 원장이 상공부차관으로 입각하고 3대 원장에 안승철 한은 조사2부장이 취임했다.
안 원장의 취임은 당시 KDI를 비롯, 각계에 적잖은 파문을 일으켰다.
안 원장의 개인적인 능력이야 나무랄 데 없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KDI원장의 위상이 한은 조사부장급 밖에 안 되느냐는 것이었다.
안 원장은 당시 신병현부총리와 금기환상공부차관의 천거로 발탁됐다.
86년10월 안 원장이 신용보증기금 이사장으로 옮겨가고 김만제 부총리·사공일 경제수석의 천거로 박영철 고대교수가 뒤를 이었다. 박 원장은 사공일 수석과 대학동기다.
그는 KDI연구의 질적 수준을 높이자는 취지아래 연구원들을 상당히 다그쳤다고 한다.
정부의 주문에 따라 단기적인 정책개발도 해야 하지만 기념비적인 것을 해야 한다며 의욕적으로 일을 하려다 사정일수석이 재무장관으로 옮겨 앉는 바람에 취임 7개월만에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자리를 바꾸었다.
KDI 발족 초기에 부원장으로 있다가 에너지 경제연구원장 및 학계를 거쳐 87년 5대 KDI원장으로 되돌아온 현재의 구본호 원장은 김만제 전 원장의 경북 중 후배. 한때 그는 사우디아라비아 경제기획부의 경제고문을 지냈으며 이를 계기로 석유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여 왔다.
구 원장은 6공들어 정치·경제·사회환경이 크게 변하면서KDI의 새로운 위상정립에 고심하고 있다.
최근 공무원을 비롯, 각계 이코노미스트들의 수준이 높아지고 국책·민간연구기관이 잇따라 생기면서 종래의 KDI역할을 재 조명해야 한다는 소리가 드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 학문적 소신에 입각해 발언하기보다는 정부의 눈치나 보면서「해바라기성 논리」를 펴거나「바람잡이역할」에 충실해 왔다는 비판에도 맞서야 한다. <경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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