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필 '우정의 해'에 … 틀어지는 한·일 외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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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일 청와대 현관에서 콩고민주공화국 대통령을 배웅한 노무현 대통령과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이 환담하며 집무실로 돌아오고 있다.김춘식 기자

17일 오후 3시30분 서울 세종로 정부 중앙청사 5층. 정동영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장 겸 통일부 장관이 신 대일 독트린을 담은 발표문을 또박또박 읽어내려갔다. 한.일 관계가 이전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단계로 접어드는 순간이었다.

일본 시마네(島根)현 의회가 '다케시마의 날' 제정 조례안을 통과시킨 지 하루 만이다. 대응이 신속했던 만큼 국내외의 관심도 그 어느 때보다 높았다. 5층 브리핑룸은 아침부터 100여 명의 내외신 기자가 몰려들어 일찌감치 만원을 이뤘다.

◆배경과 의도=정부는 지난 연말까지만 해도 대일 과거사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꺼렸다. 노무현 대통령도 지난해 7월 제주도 한.일 정상회담에서 "내 임기 동안에는 과거사 문제를 공식 의제나 쟁점으로 제기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터였다.

하지만 정상회담 이후 일본 측의 태도는 전혀 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올해 수교 40주년을 맞아 한.일 우정의 해를 기념하기로 약속해 놓고는 독도 문제로 먼저 '도발'을 해왔다. 그러자 정부 내 분위기가 돌변했다. 더 이상 좌시해서는 안 된다는 강경론이 거세게 일었다.

이날 발표는 기선 제압의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올해는 독도.과거사.교과서 등 한.일 간 3대 현안이 동시에 몰린 흔치 않은 해다. 이 때문에 정부도 올 초부터 단단히 준비해왔다고 한다.

더욱이 지난 연말 일본 후소샤(扶桑社)의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비공식 입수해 보니 2001년판보다 훨씬 더 왜곡된 것으로 확인됐다. 시마네현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았다. 그래서 미리 공식.비공식 외교 경로를 통해 우리 정부의 입장을 분명하게 전달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일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이대론 안 되겠다"는 판단을 내렸다는 것이다.

◆고민과 전망=정부의 고민은 어떻게 일본을 움직일 것이냐 하는 것이다. 일본이 지금처럼 무성의하게 나와도 대응 수단이 별로 없다는 걱정이 벌써 외교부에서 나온다. 경색 국면을 오래 끌고 가면 한.일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이 지연되고 일본 내 한류 열풍이 식는 등 실리를 잃어버릴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양측의 입장이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는 독도 문제에서 꽉 막혀 있다는 점도 전망을 더욱 어둡게 하고 있다. 그렇지만 정부 당국자는 "지켜봐 달라"고 했다. 미리 카드를 보여줄 수는 없지만 나름대로 치밀하게 카드를 마련해 왔다는 것이다.

당장 일본의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 시도를 적절히 활용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온다. 종군위안부나 원폭 피해자 등 1965년 한.일 협정에서 다루지 않은 사안에 대해 일본 측의 도의적 책임을 추궁하려는 전략도 세워놓았다고 한다. 한 당국자는 "연말까지 치열한 밀고 당기기가 예상된다"며 "큰 틀의 기조가 설정된 이상 모든 현안에서 단호하게 대응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박신홍 기자 <jbjean@joongang.co.kr>
사진=김춘식 기자 <cyjb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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