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아랍 3국서 세력 공유/전후 아랍세계 판도변화 전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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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미국서 절대적 영향력 행사/터키·이스라엘·이란 “견제와 균형”
걸프전에서 이라크의 패전에 따른 세력약화가 필연적인 현실로 인식되면서 전후 아랍세계의 판도변화가 당면한 관심사로 대두되고 있다.
아랍의 강자로 군림해온 이라크가 이 지역의 중심무대에서 사라짐으로써 초래되는 힘의 공백은 이 지역내 다른 힘에 의해 채워질 것이고,그 힘은 다름아닌 이란·터키·이스라엘 등 이른바 「아랍권의 비아랍국」(아랍연맹비회원국)에 의해 공유케 되리라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관측이다.
이러한 관측은 「제2의 사담 후세인」 출현을 원치않는 미국의 전후 구상과도 일치하고 있다. 프랑스의 자크 보멜박사(프랑스 미래재단 회장)는 이집트와 사우디아라비아를 축으로 한 터키·이스라엘·이란 3국간의 교묘한 세력균형이 미국이 구상하는 전후 중동질서의 요체라고 주장하고 있다.
견제와 균형의 원리를 적용함으로써 걸프전 이전의 이라크처럼 어느 한나라가 수면위로 불쑥 튀어나와 파문을 일으키는 사례를 막겠다는게 미국의 의도라는 것이다.
이들 세 나라는 이번 전쟁기간중 각자가 수행한 역할을 내세워 전후 평화협상 과정에서의 일정한 발언권을 요구하면서 새롭게 전개될 세력판도에 각자 동상이몽식 기대를 걸어놓고 있다.
이란은 이라크에서 돈키호테식 아랍민족주의와 맹목적 애국주의의 혼합물인 바트사회주의체제가 붕괴하고 나면 이란과 종교적으로 이념을 같이하는 시아파회교도가 득세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라크 인구의 6할이 시아파회교도라는 사실을 바탕으로 이란은 장차 이라크에서의 정치적 영향력 확대를 꿈꾸고 있는 것이다.
이라크에 일종의 위성정권을 수립하려던 고 호메이니의 꿈을 실현하는데 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적어도 친이란적인 정치세력의 등장은 충분히 가능하다는게 이란의 판단이다. 이번 전쟁기간중 이란이 진지한 중재자의 면모를 보이려고 노력한 것도 바로 이같은 의도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쿠르드족 문제로 고심하고 있는 터키는 이번 전쟁이 쿠르드족 자결권을 인정하는 계기가 되지않도록 각별한 노력을 기울여왔다. 다국적군에 공군기지 사용을 허락하는 조건으로 오잘 터키 대통령은 쿠르드족 문제에 대한 불간섭을 다국적군 진영에 요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중동지역의 유일한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회원국이기도 한 터키는 또 이라크의 세력약화를 기회로 서구와 아랍세계를 잇는 중동의 새로운 중심세력으로 부상할 꿈에 부풀어있다.
이라크의 무력화가 전제되지 않는한 중동평화는 불가능하다고 입버릇처럼 외쳐온 이스라엘은 이번 전쟁의 결과에 가장 만족스런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스라엘 안보에 가장 위협적인 존재가 무력진압됨으로써 아랍과의 문제를 더욱 자기 페이스대로 끌고 나갈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됐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종전과 함께 팔레스타인문제 해결이 피할 수 없는 과제로 이스라엘에 부과될 것이라는게 일부의 전망이지만 이스라엘은 이라크가 제외된 아랍권의 새로운 질서를 팔레스타인지역에 대한 점령고착화의 호기로 보고 있다는게 전문가들의 일치된 분석이다.
전후 아랍세계의 세력판도와 관련,빼놓을 수 없는 것은 이 지역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증대로 지적되고 있다. 이번 전쟁으로 아랍세계에 확실하게 발을 들여놓는데 성공한 미국은 앞으로 이 지역문제에 대해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게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이라크라는 곰 한마리를 잡아놓고 벌이게될 잔치에서 아랍국들에 돌아갈 것은 찌꺼기밖에 없다. 이번 전쟁에서 미국편에 가담한 모든 아랍국들에 그 혜택이 골고루 돌아갈 것으로 믿는다면 그것은 큰 오산이다.
이라크와 함께 아랍국 전체가 이번 전쟁의 패배자인 것이다』라는 가산 살라메박사(프랑스 국립과학원 원장)의 지적이나,『전후 중동의 어떠한 문제도 미국의 입장이라는 척도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을 것』이라는 라시드 칼리디교수(미 시카고대·중동현대사)의 말은 향후 아랍세력판도의 정곡을 찌르고 있다 하겠다.<파리=배명복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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