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출신…교향땅 밟아볼 날 손꼽아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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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평양이 고향으로 60여년가까이 탁구외길인생을 걸어온 이경호(이경호·71)씨는 탁구남북단일팀구성합의 소식이 전해진뒤 방잠을 설치기 일쑤다.
기쁨이야 이루 헤아릴수없지만 「잘돼야할텐데」 하는걱정 또한 사뭇 크기때문이다.
이씨는 평양종로국교4년때 탁구에 입문, 평양광성고보→보성전문(현고려대) 을 거쳐 56년 세계선수권대회(일본) 에 한국팀주장으로 출전하기까지 근30년간 현역활동을 한 초창기 한국「탁구의 간판스타」.
은퇴후 59년 세계선수권(서독) 여자단체 준우승의주역인 조경자(조경자·고·탁구협회재무이사) 씨등 숱한 제자를 길러냈는가하면 73년 사라예보세계선수권제패 (여자) 당시엔 한국팀총감독으로 활약,지도자로서도 명성을 날렸다.
지난해 12월의 아시아선수권대회 남북한 성적을 비교해가며 나름대로 단일팀전력분석에 골똘해있던 이씨를 만나봤다.
-핑퐁이 남북한 교류에도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했습니다. 평생을 탁구에 종사한 분으로 감회가 남다르실텐데요.
▲탁구에서 제일먼저 남북통일이 이뤄진 것같아 탁구인이란 사실이 무척 자랑스럽습니다. 1·4후퇴때 월남한 제가 꿈에서만 그려보던 고향땅을 생전에 다시 밟아볼수 있겠구나 하는 희망도 솟구요.
요즘엔 한때 북한탁구지도위원으로 활약했던. 김홍집·서원준·김옥균등 광성고보 후배들의 모습이 어른거려 잠못이루는 경우가많아겼답니다.
-탁구에서 맨처음 단일팀이 구성될수 있었던 배경엔 탁구만이 가지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텐데요.
▲남북모두 세계정상급의 엇비슷한 실력을 갖춘 것이 큰 요인입니다.세계적수준인만큼 국민들의 사랑과 관심이 크니까요.
그러나 무엇보다 큰 이유는 떨어진 반쪽을 채우고자하는 공통의 욕구가 강하기때문일 겁니다.
-해방전 남북한 탁구실력을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서로 우열을 가리기 힘들지요.당시 국내에서 제일큰 규모의 대회가 「조선선수권대회」 였는데 도시대항성격의 단체전이 가장 인기 있었습니다. 서울·평양·해주·부산·함흥등 내로라하는 강팀들이 백중세를 유지했어요. 「조선선수권대회」는 48년 평양에서 열린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이후 남북탁구가 다시맞붙게 된 것은 언제입니까.
▲72년11월 스칸디나비아오픈선수권대회에서 이에리사와 북한 차경미의 여자단식 준준결승전이 첫 공식대결이지요. 사실 이제까지 남북대결은 양측 모두에 피를 말리는 부담감을 주는 고통이었습니다.
제가 북한팀을 처음 만난 것은 71년 일본의 나고야세계선수권대회에서였저요.
양측모두 경직된 분위기로 인사조차 나누지 못했어요.
특히 남북은 서로 패할경우의 부담감 때문에 대결자체를 회피하기도 하는 신경과민을 보였지요. 73년사라예보세계선수권대회당시 이에리사· 정현숙 (정현숙)등을 앞세운 우리 여자팀의 전력이 막강할 때 북한은 한국과의 대결을 피하기 위해 헐가리까지 왔다가 되돌아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정도니까요.
이런 사정은 우리측도 마찬가지로 정말 쓰라린 기억들입니다.
-곧 구성될 단일팀의 전력을 어떻게 예상하시는지요.
▲남자팀의 전력상승은 분명합니다. 한국은 유남규(유남규· 동아생명) 김택수 (김택수·대우증권), 북한은 이근상·김성희등 확실한 에이스 둘씩은 있지만 양측모두 이를 뒷받침할 제3의 선수가 마땅치않아 고전해왔거든요. 단일팀은 이런 취약점을 해소시켜 우승까지 노러볼만해 기대가큼니다.
-어렴게 성사된 단일팀을 계속 유지·발전시키기위해 필요한 점은 무엇입니까.
▲승패,또는 성적에 관계없이 남북선수들이 하나로 힘을 합쳐 노력하는 모습에 전국민적인 관심과 성원이 뒤따라야 할것은 물론입니다.
하지만 성적이 좋아야 단일팀구성의 의의가 살러지고 전통이 이어지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남북선수들의 수적배합에 너무 신겅쓰지말고 그때그때 상황과선수들의 컨디tus을 면밀히점검, 최선의 진용으로 대전에 임하는 용병의 묘를살렸으면 좋겠습니다.<유상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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