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책특권 내세운 중국대사관 직원 음주측정 거부 … 8시간 대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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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주운전 단속을 거부한 채 실랑이를 벌인 중국대사관의 외교관 차량. [SBS-TV 촬영]

주한 중국대사관 외교관 차량이 음주측정을 거부하며 경찰과 8시간30분 동안 도로에서 대치하는 소동을 빚어 파문이 일고 있다.

12일 오후 9시50분쯤 서울 서대문구 대현동 신촌기차역 앞 도로에서 음주운전 단속을 벌이던 서대문경찰서 교통과 직원들이 외교관 번호판을 단 은색 쏘나타 차량을 세우고 음주측정을 요청했다. 그러나 차량 운전자는 창문을 닫은 채 아무런 대꾸도 없이 음주측정을 거부한 채 빠져나가려고 했다. 이에 경찰은 순찰차를 동원해 인근 골목으로 차량을 유도한 뒤 신원확인을 거듭 요구했다. 그러나 4명의 탑승자는 여전히 차 문과 창문을 잠그고 경찰의 요구에 불응했다. 대치 상황이 계속되자 13일 오전 4시30분쯤 서울경찰청 외사계 직원들이 외교부 관계자, 한국말을 하는 중국대사관 참사관과 함께 현장에 출동했다.

참사관은 "운전자가 대사관 직원이 맞으니 보내 달라"고 요청했지만 경찰은 "운전자가 직접 신분증을 제시해야 한다"고 맞섰다. 결국 오전 6시30분쯤 외교부 직원이 "운전자가 중국대사관 과학기술 3등 서기관이 맞다"며 신원을 대신 확인해 준 뒤에야 차량은 현장을 떠났다.

현장에 나갔던 서대문서 김창호 외사계장은 "차량이 대사관 소속이긴 하지만 운전자가 외교관이 아닐 경우 면책특권이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고 판단해 신분을 확인해야 했다"며 "창문 1cm만 열고 신분만 확인해주면 그냥 보내겠다고 했는데도 묵묵부답이었다"고 말했다. 서울경찰청 외사계 관계자는 "해당 외교관들이 단속 경찰이 '불심검문'을 한다고 생각해 거부한 것으로 보인다"며 "치외법권을 적용받는다고 해서 임의로 음주운전을 방치한다면 무고한 피해자가 생길 수도 있다"고 말했다. 경찰은 통상 외교관 신분이 확인되면 음주측정을 하지 않는다.

송민순 외교부 장관은 이날 내.외신 정례 브리핑 중 이 사안에 대한 질문을 받고 "외교관은 '빈 협약'에 따라 면책특권을 갖지만 주재국 법령을 준수할 의무에 귀를 기울이는 처신을 하기 바란다"고 말했다.

송금영 외교부 주한공관담당관은 "각국은 외교관의 법규 위반에 대해 다양한 양태로 대응하고 있다. 음주측정 거부의 경우 외교부가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현지 경찰의 판단에 따라 면허취소 등 강한 조치를 취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중국대사관 관계자는 "외교관 차량을 정차시키고 신분을 확인하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라며 "외교관들은 줄곧 한국의 법령과 법제를 준수하고 존중해왔다. 당시 도로가 혼잡한 상태에서 서로 오해가 빚어져 발생한 사안으로 보이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권호 기자

◆ 외교 관계에 관한 빈 협약=1961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채택돼 64년 6월 발효된 조약. 외교 사절단의 파견에 관한 사항과 그 특권 및 면제 사항 등을 규정하고 있다. 동시에 주재국 법령을 존중해야 한다는 의무 사항도 포함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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