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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듀! '메디컬센터 하얀 천사'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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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1959년 말 열린 국립의료원 간호대학 제1회 가관식에서 외국인 교수가 학생에게 간호사 모자를 씌우고 있다. 가관식은 임상실습을 하기 전에 치르는 행사다. 지금은 가관 행사는 없어지고 촛불을 켜고 나이팅게일 선서를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국립의료원 간호대학 제공]

1958년 해외 원조로 지어졌던 국립의료원 간호대학이 48년 역사를 뒤고 하고 문을 닫는다. 설립 당시 이 학교는 국내 최고 수준의 간호학교였다. 학생 전원이 국비장학생으로 학비를 전액 면제받는 유일한 학교이기도 했다.

이 학교는 설립 배경부터 독특했다. 전후 재건을 위해 의료인력 양성이 시급하다는 유엔 결의에 따라 학교가 세워졌다. 건물 건립과 학교 운영은 스칸디나비아 3국(노르웨이.스웨덴.덴마크)이 맡았다. 스칸디나비아 3국이 한국전쟁 당시 인천.부산 등에서 병원 운영을 지원했던 것이 인연이 됐다.

당장은 영어로 의사 소통이 되는 간호사의 양성이 급했다. 당시 국내 최고 병원이었던 '메디컬센터(국립의료원의 전신)'에서 일하던 외국인 의사를 도울 간호사가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수업의 80~90%는 영어로 진행됐다. 아침마다 영어로 보고서를 발표하느라 스무 살 전후의 앳된 학생들은 골치를 앓았다. 먹을 것이 부족했던 시절 무서운 외국인 사감 선생의 눈을 피해 부식 창고로 숨어들었던 학생들의 사연은 지금도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서울 을지로에서 폐허 속에 세워진 2층짜리 학교 건물과 기숙사는 그 자체로 화제였다. 연탄이 귀했던 시절 이 학교 기숙사에는 온수 보일러가 설치됐다. 발코니가 달린 기숙사는 다른 학교 학생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1970년 이 학교를 졸업한(9회) 송지호(58) 국립의료원 간호대학 산학협력단장은 "기숙사를 개방하는 날은 큰 구경거리가 생긴 것처럼 사람들이 몰렸다"고 회상했다.

초기 10년간은 매년 21~31명의 신입생을 특차로 뽑아 소수 정예로 교육했다. 학비가 면제되는 만큼 쉴 틈 없이 공부해야 따라갈 수 있을 정도로 교육 강도가 강했다. 방학은 여름.겨울 각각 2주뿐이었다. 이마저도 국립의료원의 인력 사정에 따라 두 조로 나눠 쉬었다. 교육 과정의 70% 이상은 실습이었다.

절대적으로 간호사가 부족한 시절이라 신분만 학생이지 사실상 간호사 일을 한 셈이다. 무료 교육을 받는 대신 졸업생들은 3년간 의무적으로 국립의료원에서 근무했다.

이런 전통 때문에 공공의료 분야에서 이 학교 출신들이 주요 역할을 하고 있다. 최규옥(3회)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전 상무, 이금자(12회) 국립서울병원 간호과장, 박수원(13회) 국립재활원 간호과장, 김남신(14회) 국립암센터 전 간호과장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간호계에서 영향력을 크게 키우지는 못했다. 북유럽 학제에 따라 3년제로 시작한 것이 화근이었다. 4년제 간호학과 출신에 비해 보수나 승진 등에서 불이익을 받았다. 이 때문에 애초 목표와 달리 초기 10년 졸업생의 대부분이 의무 근무를 마친 후 미국 등으로 해외 취업을 했다. 영어에 능통하고 유럽식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60년대엔 엄두도 내기 어려웠던 해외 취업이 용이했다. 독일에 광부와 간호사가 본격적으로 진출한 것은 70년대의 일이다.

68년 스칸디나비아 3국의 지원이 중단됐고 80년대 중반에는 3년 의무 근무가 폐지되고 학비 무료 혜택도 없어졌다. 자력으로 4년제 전환을 힘썼지만 학생 1000명 규모에 맞춰진 전환 요건을 맞추기가 어려웠다.

결국 보건복지부는 12일 국립의료원 간호대학을 폐교하고 2007년 신입생을 성신여대에서 받기로 했다고 밝혔다. 3년제였던 교육 과정은 4년제로 바뀐다.

김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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