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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거인 EC "정치난쟁이" 콤플렉스|독 쥐트도이체 차이퉁지 사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2면

이번 걸프전으로 미국은 그간 냉전체제가 붕괴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잃어온 정치·외교적 입지를 다시 강화할 수 있을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이는 지난해 독일통일로 절정에 달했던 탈냉전·동서화해의 국제질서 속에서 어느 정도 주도권을 잡았던 유럽 각국에는 그만큼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해 이번 전쟁을 바라보는 유럽인들의 심정은 여러 가지로 착잡하다. 독일 쥐트도이체 차이퉁지의 디터 쉬뢰더 주필은 7일자 사설에서 이번 걸프전과 관련한 유럽의 위치에 대해 분석한 뒤 유럽국가들이 다시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자국의 이익을 어느 정도 희생해야 한다고 말했다. 【편집자주】
자크 들로르 유럽공동체(EC)위원회 위원장의 말처럼 이번 걸프전은 유럽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EC외무장관들은 이 상황에서 탈피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아직 이렇다할 성과는 없다.
지난주초 겐셔 독일외무장관과 뒤마 프랑스외무장관이 EC공동의 방위정책을 내놓았으나 곧바로 영국과 네덜란드의 반대에 부닥쳤다.
소련에 대한 생필품지원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재정지원문제와 마찬가지로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EC는 현재 일종의 콤플렉스에 시달리고 있다. 경제적으로 거인이지만 정치적으로는 아직 난쟁이에 불과하다는 표현이 적절하다.
EC공동의 정치적·경제적 문제에 관한 협상들은 각국의 이해관계에 얽혀 실패로 끝나기 일쑤다.
독일정부는 통화동맹으로 EC의 꿈인 정치적 통합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이는 외교·안보정책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문제다.
외교문제는 유럽안보협력회의(CSCE)나 독일통일 등에서와 같이 비교적 협조가 잘돼왔지만 안보문제는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안보문제에서는 종종 미·영 등 대서양 세력과 프랑스사이에 대립이 있어 왔다.
냉전의 종식은 과거 적대국들의 사이를 가깝게 만들었다.
이에 기초한 겐셔와 뒤마의 외교·안보적 제안이 걸프전으로 과거의 그림자가 다시 떠오르는 시점에 나왔다는 것은 어느 정도 시기를 맞추지 못한 것으로 봐야한다. 60년대초 미국과 영국의 군사·정치적 우위에 격분한 드골 프랑스대통령은 나토지휘하에 프랑스군이 편입되는 것을 거부했고 영국의 EC가입을 방해했다.
이러한 과거의 기억은 프랑스군이 자의반 타의반으로 다국적군의 일원으로 싸우고 있는 이번 걸프전에서 다시 떠오르고 있다.
영국은 파리-본 주축의 안보·방위정책이 EC를 미국에서 떼어낼 수도 있는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따라서 영국으로서는 이번 전쟁으로 미국과「특별관계」를 재생시키고 외교·안보정책이 「유럽 국가들의 거부」속에 불변하는 것을 기뻐하고 있다.
이번 걸프전에서 EC는 사실상 아무 역할도 수행하지 못했다.
최종결정은 유엔이 했고 또 미국이 했다. EC는 중재자 역할도 못했고 후세인 이라크대통령의 위협을 평가하는 데도 의견의 불일치를 노출했다. 단지 프랑스와 영국이 다국적군 참여국으로서 다소의 임무를 떠맡았을 뿐이다.
앞으로도 EC의 역할이 그다지 기대되지 않는다.
걸프전이 끝나면 미국주도하의 새질서, 즉 팍스아메리카나가 다시 도래할 것이다. 이는 미국과 이스라엘·사우디아라비아를 만족시키는 형태가 될 것이기 때문에 EC의 주도적 역할은 기대할 수 없다.
EC공동의 외교·안보정책에 대한 또 다른 장애는 통일독일이다.
소련에 대한 생필품 지원문제만 해도 그렇다. 덴마크나 네덜란드는 발트해3국에 대한 소련정부의 무력진압에 항의, 이에 반대하고 있으나 소련과 특수관계에 있는 독일은 이에 찬성하고 있다.
독일의 통일을 국제법상으로 인정하는 이른바 「2+4조약」이 미·영·불 전승 3국으로부터는 비준됐지만 아직 소련의 비준을 받지 못하고 있어 독일은 소련에 대한 생필품지원이 계속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앞으로 유럽전체의 방위정책에 대한 구체적인 형태는 겐셔와 뒤마가 제안한대로 서구동맹(WEU)이 돼야 한다. 물론 자국의 이익이 오랫동안 이에 대한 장애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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