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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에 딱한번 '와인잔치' 유명인사 300명 북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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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잔의 와인에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는 와인전문지 ‘와이니즈’ 김정미 대표. 그는“와인의 다양한 영역을 다루는 직업이니 늘 볼이 발그스름하겠다”는 물음에 홍조로 답했다. 사진=손용석 포브스코리아 기자

2006년 11월 28일 저녁 7시. 멋진 턱시도를 차려입은 신사들과 화려한 이브닝 드레스를 걸친 여인들이 밀레니엄서울 힐튼호텔의 그랜드 볼룸으로 속속 몰려들었다. 이 중엔 강금실 전 법무장관과 같은 유명 정치인들도 있었고, 제임스 비모스키 (주)두산 부회장처럼 재계 CEO들도 있었다. 정준호, 유열 씨처럼 연예인들도 곳곳에 눈에 띄었다. 각계 오피니언 리더 300여명를 한자리로 불러모은 공통분모는 무엇일까. '와인'이었다.

이날 행사는 프랑스 보르도의 특급 와인 연합회인 '보르도 그랑크뤼 연맹'(UGCB:Union des Grands Crus de Bordeaux) 소속 양조장(샤토) 주인들이 국내 와인 애호가들을 위해 주최한 자리였다. UGCB는 보르도 지역에서 최고의 포도원을 뜻하는 '그랑 크뤼'(Grand Cru)급 샤토 130개로 구성된 와인협회다.

올해로 3회를 맞는 이 행사는 국내 와인애호가들로선 1년을 손꼽아 기다리는 자리다. 평소 맛보기 힘든 보르도 고급 와인을 한 자리에서 시음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와인을 만든 오너들과 이야기도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참가비가 30만원의 고가이지만 행사장엔 300명 정원이 가득 찼을 정도로 성황을 이뤘다.

이 날 행사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사람이 있었다. 화려한 핑크색 드레스를 입고 테이블을 오가며 사람들을 일일히 맞이한 '파티의 안주인' 김정미(38) 와이니즈 사장이다. 와인 전문지 <와이니즈>의 발행인인 그는 UGCB의 요청을 통해 이번 행사의 진행을 도맡았다. 지난 12월 6일 그를 다시 만나 와인과의 남다른 인연을 들었다.

"수십명의 유명 샤토 오너들이 한꺼번에 방문한다는 것 자체만으로 한국 와인 시장이 얼마나 성장하고 있는지 잘 보여주죠. 하지만 그들은 와인 홍보보다는 와인에 대한 철학을 한국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어하더군요."

그에게 와인은 모든 분야에 접근할 수 있는 '코드'다. 그는 "영화 <다빈치 코드>에서도 비밀의 실마리가 와인과 연관돼 있다"며 "와인 안에는 종교나 역사 뿐 아니라 예술, 명품, 금융 등 사회 모든 분야에 접근할 수 있는 코드가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와인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할 정도로 오래됐다. 와인을 통해서라면 예술에도 손쉽게 접근할 수 있다. 앤디워홀, 피카소 등 유명 화가들의 그림을 라벨에 붙인 특급 와인 '샤토 무통 로쉴드'의 라벨을 보면 최근 회화의 트렌드를 읽을 수 있을 정도다. 명품도 마찬가지다. 루이비통이나 구찌, 페라가모 같은 명품 회사들은 현재 앞다퉈 와인 생산에 열을 올리고 있다. 와인은 금융과의 '코드'도 끈끈하다. 해외 유명 와인 소유주 중엔 유난히 금융가(家)가 많기 때문이다. 최근엔 와인에 직접 투자하는 열기도 뜨겁다. 펀드를 통해 와인이나 포도밭에 투자해 짭짤한 수익을 올리기도 한다. 그는 "요즘 유행하고 있는 일본 와인 만화 <신의 물방울>을 보면 와인에서 천지인(天地人)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며 "상투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정말 와인엔 이 모든 것이 담겨 있다"고 강조했다.

모든 비밀의 열쇠를 가진 와인이기에 일 자체도 즐거울 수 밖에 없다. 그는 "이번 행사에 방문한 오너들 중엔 인간적으로 친한 사람들이 많다"며 "해마다 프랑스를 방문하면 이들 집에 초대받아 숙식을 해결하곤 한다"고 말했다.

김 사장이 와인과 인연을 맺은 것은 15년 전 프랑스 유학 시절이었다. 그는 당시 부르고뉴 지방의 디종 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했다. 부르고뉴는 보르도와 더불어 프랑스 양대 와인 산지. 그는 "대학에서 교양 과목으로 와인 강좌를 신청하면서 처음 와인을 접했다"며 "점차 와인의 매력에 빠지면서 주말만 되면 친구들과 부르고뉴의 유명 와이너리를 다니기 시작했다"고 회고했다.

당시만 해도 와인은 단순한 취미였다.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그는 파리국립은행의 한국지사에 근무했다. 하지만 와인과의 인연은 질겼다. 그는 "프랑스 회사다 보니 아무래도 와인을 마실 자리가 많았다"며 "휴가도 긴 편이라 주로 와인을 테마로 여행을 다녔다"고 말했다. 처음엔 프랑스 위주로 다녔던 와인 여행이 이태리, 독일, 미국 등으로 점점 확대됐다. 양조장을 직접 방문해 와인을 배우면서 와인에 대한 '내공' 역시 높아졌다.

그는 결국 2000년에 은행을 박차고 나와 와인전문지 편집장으로 인생의 진로를 바꿨다. 2002년엔 아예 독립해서 회사를 차리고 와인전문지 <와이니즈>를 발간했다. 현재 와이니즈는 4년만에 국내 와인업계를 이끄는 전문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에게 좋아하는 와인을 묻자 난감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는 "매끼마다 와인을 바꿔 마셔도 죽기 전까지 똑같은 와인을 마시기 힘들 정도로 넓고도 깊은 게 와인"이라며 "항상 새로운 와인을 즐기는 편"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에겐 '첫사랑' 같은 와인은 있다. 대학시절 접한 부르고뉴 지방의 레드 와인이다. 부르고뉴의 레드 와인은 피노누아란 단일 포도 품종으로 만든다. 피노누아는 토양을 가리고 날씨에 민감하며 재배마저 까다롭다. 하지만 이렇게 재배된 피노누아 와인이야말로 그 향이 섬세하며, 맛은 오묘하기 이를 데 없다. 와인을 주제로 한 영화 <사이드웨이>를 비롯해 최근 <신의 물방울>까지 모두 피노누아 와인을 극찬하며 한국에서도 주목받고 있다. 그는 "단일 품종으로 만들어지는데 그렇게 복합적인 향을 가진게 너무 놀랍다"며 "섬세하면서도 까다로운 면이 나와 비슷해서 좋아하게 되는게 아닌가 싶다"며 활짝 웃었다. 그가 이끄는 와이니즈(Wines)는 와인에 대한 열정을 가진 사람들을 말하지만 와인에 대해 까다로운 사람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최근 와이니즈는 잡지 뿐 아니라 다양한 부가 사업을 진행하며 와인 전문업체로 거듭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CEO를 대상으로 운영하는 와인 클래스 '글로벌 와인 리더' 과정이다. 서울종합과학대학원과 같이 진행하고 있는 이 과정은 6개월 코스로 현재 9기까지 배출했다. 기수별로 20 ̄25명씩 다녀 지금까지 19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이 과정은 CEO 사이에 인기과정으로 명성이 높다. 졸업생 중엔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을 비롯해 구자열 LS전선 부회장 등 유명 CEO도 많다. 그는 "이론보다는 와인 테이스팅과 같이 실습 위주로 참석자들간의 교감을 중요하게 여겨서인지 출석률이 매우 높은 편"이라며 "과정이 끝나도 기수끼리 한달에 한번씩 꾸준히 만날 정도"고 말했다. 그는 "CEO들이 나서서 와인 홍보를 해준다면 국내 와인 문화가 좀 더 빠르게 확산되지 않겠냐"고 덧붙였다.

그에게 와인은 고부가가치를 주는 미래지향적인 사업이다. 그는 "제주도의 감귤 사업이 중국산 귤의 저가 공세 때문에 힘들다고 하는데 포도를 심어 와인을 만들 수 있다면 이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며 "이태리의 친퀜테르 같은 곳은 제주도와 기후가 비슷하지만 정말 좋은 와인이 생산되고 있다"고 말했다. 국내 와인 시장에 대해선 매우 긍정적이다. 그는 "국내 와인산업은 특이하게도 젊은 사람 동호회 중심으로 주도하며 매년 30 ̄40%씩 성장하고 있다"며 "한국에서 와인 시장이 좀 더 성숙하게 되면 수입에 그치지 않고, 헝가리 토카이 와인이나 캐나다 아이스 와인처럼 훌륭한 국산 와인들이 생산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가 와인을 마시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덕목 중 하나는 '겸손'이다. 그는 "한국에선 와인을 마시는 사람과 마시지 않는 사람 사이의 괴리가 크다"며 "와인을 많이 마실수록 겸손해질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와인은 나눠 마실 때 기쁨이 배가 된다"며 "와인의 가치를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지인들을 와인 앞으로 끌어내는 비결을 묻자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비결은 제가 아니라 와인이죠. 와인은 자체만으로 가장 좋은 커뮤니케이션 툴(도구)이랍니다."

손용석 포브스코리아 기자 soncin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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