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자주의식 듬뿍 밴 민족문화 "원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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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우리는 흔히 『삼국유사(삼국유사)』가 어떤 책이냐고 물으면 대답을 잘하지 못해도, 우리의 건국신화인 단군신화가 어느책에 실려 있는가라는 질문에는 곧잘 『삼국유사』라고 답할 줄 안다.
마찬가지로 신라시대 향가의 내용은 잘 몰라도 그것을 많이싣고 있는 책이 『삼국유사』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 정도로 『삼국유사』라는 고전은 우리곁에 있으며 우리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고 있다.
그러나 그 책을 읽었거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우리나라에서 현재까지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역사책은 『삼국사기(삼국사기)』지만 가장오래된 신화와 역사적 사실을 전해주는 책은 『삼국유사』다.
이 책은 고려후기 선종승려였던 일연(일연·l206∼1289년)이 오랫동안의 자료수집 끝에 퍼낸 것이다.
내용은 책이름 그대로 삼국시대의 잊혀지고 기억되지 많은 「남은 사적」에 관한 것들.
남은 사적이라고 하지만 주로 불교관계 얘기가 대부분이다.
이 책은 고려중기에 쓴 『삼국사기』(1145년)보다는 1백40여년이나 늦게 충렬왕 7년(1281년)께 완성된 것이다.
여기서 굳이 『삼국사기』를 말하는 것은 고려시대에 출간된 이 두 책이 많은 대조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가 정부에서 편찬한 관선의 정사라면 『삼국유사』는 사찬의 야사다.
전자가 기부체 형식의 틀에 매여 있다면 후자는 그러한 형식을 뛰어넘고 있다.
전자가 유교적 합리주의를 바탕으로 사실 기술에 치중하고 있다면 후자는 불교적 이적을 신봉하고 신앙적 초합리성을 보여주고 있다.
『삼국사기』가 여진족에 굴복한 사대파인 김부식이 여진(금)정복과 북벌을 주장한 묘청 일파를 정복한 후에 편찬한 것이기 때문에 사대적 성격을 보여준다고 지적되는데 비해 『삼국유사』는 저자가 몽골과의 투쟁을 체험했기 때문에 민족적 자주성을 고양하고 있다고 지적된다.
저자 일연은 지눌(지눌·진조국사)과 혜심(혜알·진각국사)으로 계승되는 고려 조계종의 학맥을 잇는 신흥의 선종승려였다.
조계종으로 대표되는 선종이 무신집권기에 발전하고 있었던 것은 그 이전의 문신귀족과 공생관계를 유지했던 종파가 화엄·천태로 대표되는 교종 불교였다는 점에서 구분된다.
고려중기까지의 군신 귀족정권은 대체로 지방세력 및 기층사회를 배제·억압하면서 그들의 정치·경제적 이익을 독점했다.
기층민중에서 유리돼 있었던만큼 그들은 외세(금)에 의존해야 했다.
이들을 지지해준 관념지주가 바로 교종이었고 유교적 정치이념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신흥의 선종인 조계종은 고려 군신귀족들과 연대관계에 있던 교종 및 유교적 이념과는 지향점을 달리했고 지지계층 또한 중앙의 귀족벌열들일 수는 없었다.
『삼국유사』가한 선종승의 역사기술이라면 먼저 이점이 주목돼야 할 것이다.
『삼국사기』와는 대조적이라 할 정도로 『삼국유사』가 민간에 전승되고 있는 민중의 이야기를 많이 섭렵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최씨 무신 집권기에 태어난 일연은 아마도 무인정권하의 반문화적인 여러 요소들을 체험하고 성장했을 것이다.
그가 26세 되던 l231년부터 30여년간 계속된 몽고 침략과 그 뒤에 계속된 원나라의 통제는 민족문화와 역사전통에 대한 강한 자부심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같은 체험을 하고 있던 유가적 신진 문인인 이규보(1168∼1241)도 『동명왕편』을 쓰면서 『천하로 하여금 우리나라가 본래 성인의 도읍임을 알게 하려 한다』고 한바 있는데 이같은 역사의식은 반문화적인 무인정권과 야만적인 이민족의 침략을 받고 있던 유교적 신진들이나 신흥의 선종승들에게서 다 같이 보이고 있는 공통점이었다.
이러한 역사의식을 전제로 할 때 『삼국유사』에 우리나라의 개국신화인 단군신화가 그 서두를 장식하고 단군의 후예로서 부여·조선·삼한 등 여러나라와 개국·민간실화가 수록돼 있는 것은 충분히 이해됨직한 사실이다.
『삼국유사』는 삼국시대 제왕의 연대기라 할 왕력평을 비롯, 「기이(기리)」「홍법(흥법)」「탕상(탕상)」「의해(의해)」「신주(신주)」「감통(감통)」「피은(피은)」「효선(효보)」등 9편으로 구성돼있다.
내용의 절반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기이」편은 삼국과 그 이전의 우리나라 역사의 특이한 점을 주로 다루고있으며 「홍법」편 이하는 주로 불교신앙과 관련된 여러일사(일정)들을 수록했다.
때문에 『삼국유사』는 우선 불교문화사로서의 독특한 성격을 지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전평에 흐르는 일연의 관심은 강렬한 자주의식과 불국 사상 및 서민의식으로 요약할 수 있다.
자주의식은 단군신화 등에서 보이는 바와같이 오랫동안의 항몽투쟁을 통해 부각된 것으로 천손의식·문화의식으로 파급되고 있었다.
불국 토사상은 단군이래 우리나라가 부처는 물론 빈부귀천의 인간과 천지만물이 선량한 이웃으로서 불국토질서의 실현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으로 지적된다.
서민의식은 기사의 소재가 서민적 분위기 위에서 형성된 것이며 비록 그것이 제왕과 지배계급에 관한 것이라 하더라도 서민과의 관계에서 재해석되고 있다.
『삼국유사』는 일연이 독창적으로 기술한 것이 아니고 1백50여종이상의 자료와 준거를 기초로 서술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일연이 우리문화에 대해 얼마나 깊은 애정을 가지고 그런 자료들을 수집했으며 역사가에게 필요한 고증정신을 얼마나 철저히 갖고 있었나를 알 수 있다.
자료중심으로 서술했기 때문에 『삼국유사』는 『삼국사기』보다 1백40여년이나 뒤늦게 편찬됐지만 그보다 훨씬 오래된 역사적 사실을 담고 있다.
건국신화나 각종 설화·언어·민속 등 우리나라 고대의 원형보존이라는 점에서 『삼국유사』는 현존하는 어떤 문헌자료에도 비교할 수 없는 고서임에 틀림없다.
『삼국유사』의 「원형보존」적 성격은 우리의 고유문화와 민족적 자주성에 대한 깊은 애정 위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이 시점에서 우려가 『삼국유사』를 대할때 유의해야할 점들이 있다.
그것은 『삼국유사』가 고유문화를 존중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거기서 복고주의적 교훈을 얻으려는 발상은 삼가야한다는 것이다.
또 하나 『삼국유사』가 『삼국사기』적 유교사관을 극복하기 위해 불교적 신이사관을 내세웠지만 그 신이사관이 오늘날 그대로 계승될 수는 없다는 점이다.
민족적 자주성과 전통적 문화관을 바탕으로 첨단 과학문명과 민중 민주사회를 이룩해야 할 과제를 지니고 있는 우리세대는 민족문화의 한 원형 보존으로서의 『삼국유사』에 접근, 거기서 미래를 열수 있는 과거와 현대인의 계산된 과학주의를 뛰어넘는 고대인의 정신을 발견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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