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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약을 어디서 구하겠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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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사무실을 옮기다 잊고 있던 짐 하나가 나왔다. 보따리를 풀었더니 약들이 쏟아진다. 알약.가루약.물약.고약.첩약.탕약…. 참 골고루도 섞여 있다. 먹는 약, 바르는 약, 붙이는 약, 죄다 있다. 1년 전 것이 있는가 하면 10년 전 것이 있다. 양(量)이 놀랍고, 종(種)이 신기했다. 대부분 겉봉을 뜯어보지 않은 것들이다. 희한하게도 내가 산 약은 없었다. 하나같이 선물 받은 것만 모아놓았다. 약이 선물이 되는지 모르겠다. 준 사람은 선물이라고 했다. 그들은 약을 건네며 "건강하세요"라는 덕담을 빠뜨리지 않았다. 왜 이리 많은 약을 받은 것일까. 내가 병치레 잦은 약골로 보였나 싶어 민망했고, 먹으라고 준 선물을 입에 대지도 않은 것이 미안했다. 약통의 먼지를 털어내며 그들의 맘씨를 돌이켜보았다.

촌스러운 포장지를 붙인 약에 먼저 눈이 간다. 오래전 재미화가가 북한에 가서 사온 것이다. 그는 약 이름이 재미있다고 깔깔 웃었다. '다시마 알'이다. 다시마에 무슨 알이 있을까 보냐. 내용물은 알약이다. 다시마에서 추출한 성분을 환(丸)으로 만들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따지자면 약품이 아니라 식품이다. '식약동원(食藥同源)'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내남없이 몸에 좋은 것은 다 약이라 하니 그냥 넘어가자. 아닌 게 아니라 효능 설명서를 읽었더니 약을 뺨친다. 동맥경화증을 예방하고 치료한다. 중금속 해독에 좋다. 한술 더 떠 '방사선 피해 방지'까지 한단다. 나는 피폭(被曝)의 염려가 거의 없는 사람이다. 재미화가가 별 걸 다 걱정해줬구나 싶었다. 아니, 아닐지도 모른다. 최근 피폭을 상상하는 사태가 이 땅에 벌어졌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그는 선견지명이 있다고 해야겠다. '다시마 알'을 만든 북한은 괘씸하다. 병 주고 약 주는 셈이다. 하루 세 번 세 알씩 먹으라는데, 지금이라도 먹어둘까 하다가 다시 보니 유통기한이 2001년이다. 개똥만 아니라 '다시마 알'도 약에 쓰려면 없다.

이래저래 몸 보하기는 글렀구나 하다가 플라스틱 용기에 든 약에 손이 미쳤다. 무슨 무슨 '골드'라고 돼 있다. 이것도 건강보조식품이다. 시골 사는 한 여성이 연말 선물로 주었다. 잘됐다 싶어 성분과 함량을 살펴봤다. 눈이 번쩍 뜨였다. 자라의 특정 부위를 순간적으로 얼렸다 말린 뒤 잘게 부수어 분말로 만들었다고 한다. 자라는 강정제(强精劑)로 쓰인다는 것쯤 나도 안다. 게다가 강력한 성분이 첨가됐다. '질 좋은 캐나다산 물개에서 짜낸 물개 기름'이 함유된 것이다. 나는 또렷이 기억한다. 선물을 준 여성이 한 말을. 그녀는 "건강하세요"하지 않고 "힘 내세요"라고 말했다. 말랑말랑한 캡슐을 만지작거리며 그 여성을 그려봤다. 배려가 가상해 눈시울이 뜨겁다. 이 '단백질과 미네랄, 비타민의 우수한 공급원'을 장복하고 나면 힘 좀 쓰게 될지 모른다. 제품 맨 아래쪽에 유통기한과 권장소비자가격이 씌어 있다. 가격은 28만원. 이 정도 고가라면 효능에 절로 믿음이 생긴다. 그런데, 이런 낭패가 있나. 유통기한이 '2004년 3월 7일까지'로 돼 있다. 헛물만 켜다 만 꼴이다.

보따리에 든 숱한 약은 버리고 선물한 사람의 마음은 챙겼다. 돌아보면 그들은 나와 교분이 두텁고 고마운 사람들이다. 유독 나에게 약을 준 적이 없는 선배의 얼굴이 겹친다. 그의 말이라면 콩 심은 데 팥 난다고 해도 믿는 나다. 그는 약 대신 말로 때웠다. 조선 후기 한의학자로 '사상의학'을 창안한 이제마의 말이다. '사람의 엉덩이에는 게으름이 들어있고, 어깨에는 교만함이, 허리에는 음란함이, 심장에는 욕심이 들어있다'. 게으름과 교만함과 음란함과 욕심이라니. 이야말로 만병의 근원 아닌가. 몸이 아예 병 덩어리다. 몸은 마음에 의지하고 마음은 몸에 깃드니 어느 세상에서 묘약을 구하겠는가. 아무래도 백약이 무효일 성싶다. 한 해를 보내며, 그 많은 약을 선물한 친구들아, 섭섭하겠지만 도리 없다. 무슨 수가 있겠는가. 나는 내년에도 약 안 먹고 버티련다. 삶은 고치는 것이 아니라 견디는 것이다. 그것이 직방이다.

손철주 학고재 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