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호 "나는 끝나지 않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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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삼성화재배 결승에 오른 이창호左9단과 중국의 창하오 9단. 한·중 바둑을 대표하는 두 기사는 지난 10년간 세계무대에서 27번 격돌해 이창호 9단이 21승6패로 크게 앞서 있다. [사이버오로 제공]

더 이상의 이변은 없었다. 이창호 9단과 중국의 창하오(常昊) 9단은 너무 강했고, 결국 이들이 11회 삼성화재배 세계오픈 우승컵을 놓고 최후의 대결을 펼치게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몇 달 동안 불굴의 투혼으로 삼성화재배 세계오픈 무대를 뜨겁게 달궜던 노장 서봉수 9단과 신예 백홍석 5단에게 팬들은 "수고했다"며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이창호 9단은 7일의 삼성화재배 준결승 2국에서 백홍석 5단을 맞아 227수 만에 흑으로 불계승해 2대0으로 결승 진출에 성공했다.

5일의 1국에서 승리한 이 9단은 2국에서는 훨씬 여유가 있어 보였다. 초반에 백진에서 큰 수를 내며 판세를 시종 유리하게 이끌었고 패기 넘치는 백홍석의 강렬한 추격으로 종반 무렵엔 미세한 승부로 돌변했음에도 특유의 계산력으로 역전을 막아냈다. 백홍석은 1집반 차이에서 더 이상 좁혀지지 않자 시원하게 돌을 거뒀다. 백홍석은 국후 "비록 패배했으나 바둑의 진수를 느낄 수 있는 좋은 기회였고 그것으로 만족한다. 이창호 9단의 우승을 기원한다"고 말했다.

창하오 9단 대 서봉수 9단의 대결은 좀 더 아슬아슬했다. 서 9단은 54세의 나이 탓에 정상의 승부세계에선 이미 잊힌 존재였으나 역대 전적에서 창하오에게 3전3승을 거뒀던 전력을 바탕으로 1국에서는 시종 대세를 리드해 나갔다. 그러나 초읽기에 몰린 종반 끝내기 단계에서 계속해 실점하는 바람에 역전 불계패를 당했다. 이 패배가 창하오의 자신감을 북돋워주었을까.

7일의 2국은 초반 포석에서부터 실패해 고전의 연속이었다. 서 9단은 이때부터 혼신의 힘으로 판을 뒤흔들어 역전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는 데 성공했으나 결정타가 빗나가는 바람에 분루를 삼켜야 했다.

서 9단은 "아쉽다. 승부세계에서 서봉수가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으로 만족한다"고 말했다.

이리하여 지난 7월의 예선전부터 넉 달 넘게 끌어온 삼성화재배는 이창호 대 창하오의 한.중 대결로 결승무대를 장식하게 됐다. 올 한 해 동안 세계대회 우승컵이 하나도 없어 "이창호 시대는 끝났는가"라는 세간의 분분한 논의를 우울하게 지켜봐야 했던 이창호에게 결코 놓칠 수 없는 마지막 무대가 펼쳐진 것이다.

지금까지의 전적에선 이창호 쪽이 압도적으로 우세하다. 1997년 첫 대결을 펼친 이래 근 10년 동안 두 사람은 27번을 맞붙어 이 중 21번을 이 9단이 이겼다. 바꾸어 말하면 90년대 중국 바둑의 총아로 등장했던 창하오는 바로 이창호라는 숙명의 상대를 만나 온갖 실패와 시련을 겪었던 것이다.

그러나 최근의 창하오는 거듭되는 시련을 이겨내고 다시 살아나 중국 바둑의 상승세를 주도하고 있다. 지난해엔 응씨배에서 우승했고, 올해는 춘란배에 이어 삼성화재배 결승에 오르는 등 근래의 전적만 따진다며 이창호 9단보다 더 좋다고 볼 수 있다.

결승전은 3번기로 내년 1월 22일부터 25일까지 서울 아니면 상하이(上海)에서 벌어질 예정이다.

상하이는 창하오의 고향인데 본인은 정작 "상하이는 오히려 부담스러운 측면이 있다. 나는 이곳 조용한 유성의 삼성화재연수원이 가장 마음에 든다"고 말하고 있다.

박치문 전문기자


◆ 준결승 3번기 결과

▶이창호 대 백홍석

1국 이창호 152수 백 불계승

2국 이창호 227수 흑 불계승

▶서봉수 대 창하오

1국 창하오 207수 흑 불계승

2국 창하오 182수 백 불계승

결승전 앞둔 두 기사 각오

이창호 9단과 창하오 9단은 중국 발음으로 똑같이 창하오다. 연배도 이창호가 75년생이고 창하오는 76년생으로 비슷하다.

이창호 9단은 결승에 임하는 소감으로 "계속 후배들과 대결해 부담감이 있었는데 창하오와는 좀 더 편한 심정으로 대국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최근 창하오가 상승세를 타고 있는 데 대해서는 "자기관리가 뛰어난 것 같고 더욱 노련해진 것 같다. 그러나 중국 바둑에 더 이상 밀릴 수 없다. 올 한해 부진했는데 이번 대회에서 꼭 우승해 팬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창하오 9단은 "이창호 9단은 여전히 세계 일인자다. 다른 우승도 값지지만 이창호 9단에게 이겨 우승한다면 내 생애에서 더욱 의미 있는 승리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평생 넘을 수 없는 벽처럼 자신의 앞을 가로막았던 이창호 9단에 대한 심회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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