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중견기업] 한라산업개발 권형기 사장 - '기술이 있으니까 두려울 게 없더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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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1999년 10월 1일 속리산의 한 호텔. 그해 4월 갓 태어난 한라산업개발의 임직원 100여 명이 한 자리에 모였다. 이날 모임은 대기업 그늘에서 떨어져 나와 홀로서기 경영에 나서는 각오를 다지는 자리였다.

권형기(56.사진) 사장은 "기술이 있는 한 우리는 망하지 않는다"며 화이팅을 외쳤지만 분위기는 숙연했다. 몇 달 전만 하더라도 한라중공업 환경사업실에서 근무하던 이들은 외환위기 여파로 한라그룹이 쓰러지는 바람에 실직할 처지에 놓이자 분사(分社)를 감행했다.

채권단이 한라중공업을 사업 부문 별로 쪼개 팔기로 결정함에 따라 환경사업실은 사실상 공중분해될 운명이었다. 당시 환경사업실장(이사)이던 권 사장은 "죽어도 같이 죽자"며 직원들을 규합했다. 하지만 부도 난 회사에서 분사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돈 벌이가 괜찮은 사업이어서 분사하려 한다"고 판단한 관할 법원과 채권단이 꼼짝도 안했다.

권 사장은 채권단 간사인 외환은행을 비롯해 100여 개 금융기관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환경사업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실직자가 많이 나올 수밖에 없으니 분사시켜 달라"며 1년 가까이 설득한 끝에 분사를 할 수 있었다. 당시 환경사업 부문은 부채보다 채권이 더 많았지만 부채를 털고 남은 채권은 포기하는 조건이었다. 한 마디로 자산이 '0'인 상태에서 홀로서기를 해야했다. 건설업 면허 유지에 필요한 회사 설립 자본금 20억원은 종업원 퇴직금으로 충당했다. 100% 종업원 지주회사가 만들어졌다. 권사장은 "죽은 산모의 몸에서 애기를 태어나게 하는 것만큼 힘들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어렵사리 분사에는 성공했으나 출발부터 험난했다. 일감이 안 들어왔다. 분사 첫해 수주액은 70억원에 불과했고, 영업수지는 10억원 적자를 기록했다. 게다가 회사 꼴을 제대로 갖추는 것도 큰 문제였다. 일감 수주에 따른 지급채무가 급증하면서 99년 부채비율이 1000% 가까이 치솟았다. 입찰할 때 부채비율이 너무 높으면 신용도 평가에서 불이익을 받기 때문에 부채비율을 낮추는 게 당면과제였다. 자체 공장이 없으면 입찰 경쟁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 보니 공장(현 충북 음성 공장) 마련 비용(25억원)도 조달해야 했다. 자본금을 늘려야 했지만 외부의 출자는 한 푼도 기대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종업원들도 퇴직금을 모두 쏟아 부은 터라 대부분 출자 여력이 없었다. 결국 권 사장은 임원진과 함께 네 차례에 걸쳐 이뤄진 증자를 떠맡다시피 했다.

권 사장은 "분사 초기엔 수주도 어려웠거니와 수주한 공사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 중소기업에게는 바로 치명적이기에 살얼음판을 걷는 상황이 이어졌다"고 말했다.

다행히 현대양행(한라중공업의 전신) 시절부터 쌓아온 탄탄한 기술력은 시장에서 통했다. 분사 이듬해인 2000년 서울화력발전소 탈질설비(공해물질인 질소산화물을 없애주는 장치)를 비롯해 영흥화력발전소 집진설비, 경기도 파주시 음식물축분병합처리시설, 경남 밀양시 음식물하수병합처리장 등을 잇따라 수주했다. 하나 같이 쟁쟁한 대기업들과 겨뤄 따낸 것이다. 2001년 자체 공장을 가동하게 되면서 매출은 급신장했다. 2001년 500억원을 밑돌던 매출이 2003년엔 1000억원을 넘어섰고, 올해는 1500억원을 바라보고 있다. 환경사업 분야에서 국내 3~4위권 업체로 자리를 잡았다.

권 사장은 회사 설립 당시 주주이자 종업원인 후배들에게 세 가지 약속을 했다고 한다. 한국에서 가장 월급을 많이 주는 회사, 부당하게 소외되는 사람이 없는 회사, 경영진의 자식이 근무하지 않는 회사를 만들겠다고 했다. 권 사장은 둘째, 셋째 약속은 잘 지켜오고 있으나 아직 첫째 약속은 못 지켰다. 하지만 그는 2010년 내에 모든 약속을 지켜낼 것이라고 자신했다.

한라산업개발은 최근 'HIT! 5010비전'이란 청사진을 마련했다. 2010년에 매출5000억원, 이익 10%(500억원)를 달성한다는 목표다. 권 사장은 "힘든 여건 속에서도 기술개발 투자만큼은 아끼지 않아 39건의 특허를 확보했다"며 "환경설비 분야에선 국내 최고 기술을 자부하는 만큼 목표는 이뤄질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2010년께 세 가지 약속이 지켜지면 후배에게 길을 터주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날 것"이라고 말했다.

글=차진용<chajy@joongang.co.kr>
사진=신동연 기자<sdy1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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