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곡도장과 음악학교/권영빈(중앙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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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그 어머니는 음악대를 지망하는 딸에게 1년이 넘도록 명문대 음악교수를 초빙해 레슨을 받도록 했다. 물론 고액의 레슨비가 꼬박꼬박 치러졌다. 실기시험 일자가 임박해지자 그 교수는 합격을 보장하면서 거액의 사례금을 요구했다.
그만큼 레슨비를 받았으면 합격을 보장해줘야지 또 무슨 사례금이냐고 화가 치민 어머니는 전화기에 녹음장치를 해뒀다. 다음날 또 교수는 시간이 촉박하다며 합격을 위한 사례금을 독촉했다. 그 내용이 녹음되었다.
며칠뒤 어머니는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먼저 녹음된 테이프를 틀어준 다음,내딸을 입학시켜주지 않는다면 이 사실을 폭로해 버리겠다고 협박했다. 협박받은 교수는 뜬눈으로 밤을 샌채 이튿날 동료교수들에게 자신의 어려운 사정을 설명하고 그 학생을 입학시켜 주길 당부했다.
그러나 동료 교수들은 농담으로 또는 해괴한 일도 다 있다는 식으로 흘려듣고 말았고 예의 음악대지망생은 낙방했다. 화가 더욱 치민 그 어머니는 다시 교수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당신이 1년이 넘도록 그 비싼 레슨비를 받으며 어떻게 지도했기에 시험에 떨어졌느냐,그동안 받아간 레슨비를 되돌려주지 않는다면 녹음을 공개해 사회에서 매장시키겠다고 윽박질렀다. 며칠을 궁리끝에 교수는 돈뭉치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었다.
음악대 입시부정사건이 터지면서 학교주변에 나도는 여러 뜬 소문중의 압권을 이루는 사례중의 하나다.
이 에피소드에서 우리는 두가지 중대한 사실을 얻게된다. 그 첫째는 음악대학에 보내려는 학부모의 기대,넓게는 사회가 지니고 있는 예술에 대한 기대가 허영과 망상에서 출발한다는 점이다. 둘째는 이처럼 잘못된 기대를 수용하는 쪽인 학교와 교수가 그 잘못을 더욱 증폭시키고 악용한다는 사실이다.
언제부터였는지 자녀가 철들면 시작하는게 피아노 교습이고 미술학원 보내기다. 보통수준의 자녀라면 어머니의 성화와 극성도에 따라 대부분의 아이들은 피아노를 잘 치고 그림을 잘 그릴 것이다. 여기에 레슨교사가 『댁의 자녀는 예술감각이 뛰어난가봐요』라는 지나치며 하는 한 마디가 어머니의 가슴에는 환희의 전율로 가슴깊이 새겨진다.
고가의 악기를 사고 훌륭한 선생님을 찾아 고액의 레슨비를 지불할 경제력만 있다면 그 아이는 당장에 세계적 피아니스트로 성장할 것이라는 착각과 망상이 시작된다.
고액의 레슨비를 받고 학생의 스승이 된 교수는 어떤 입장인가. 비록 그 학생의 실력과 재능이 떨어진다한들 고액의 수입을 마다할 수 없다. 어차피 6세부터 친 피아노라면 특별한 학생을 제외하면 도토리 키재기다.
1년만 내 교습을 받으면 무난히 대학에 입학할 것이고 적어도 국내수준의 피아니스트는 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할 것이다. 그 호언장담을 뒷받침하기 위해 동병상련의 심사위원들이 담합하고 돈거래를 한 것이 이번 입시부정사건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처럼 예술에 대한 잘못된 기대와 왜곡된 수용체계가 오늘의 우리 예술교육을 망치는 구조적 장애물이다.
먼저 예술교육에 대한 잘못된 기대와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 간단히 말해 조치훈이 서울대학에 입학했기 때문에 일본기계를 휩쓰는 바둑황제가 되었던게 아니듯,정명훈이 서울의 음악대학에 수석입학했기 때문에 세계적 지휘자가 된게 아니라는 평범한 사실을 중시해야 한다.
조치훈이 6세 어린 나이로 일본으로 건너가 목곡도장 입문 17년만에 기성·명인·본인방을 획득했듯,정명훈은 16세에 뉴욕으로 가 줄리어드에서 지휘를 배우고 각고의 연주활동을 거쳐 36세에 바스티유 오페라 음악감독겸 지휘자가 된 것이다.
이들의 재능을 조기에 발견하고 그 재능을 수용할 학교와 스승이 있었고 자신들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러나 우리에겐 예술적 재능을 일찍 발견해 이들을 가르치는 예술교육기관이 없기 때문에,기존의 음악대학이 그런 기능을 맡을 능력이 없기 때문에 잘못된 학부모의 기대는 대학입시에까지 연장되고 돈으로 그 기대를 사려는 풍조가 생겨나는 것이다.
프랑스의 국립파리음악원,미국의 커티스 뉴잉글랜드라는 음악학교가 컨서버토리형식으로,바둑으로 치면 목곡도장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기대가 자연스레 수용될 수 있는 것이다.
음악대학이 명연주자를 키우는 학원이 아니고 미술대학이 화가를 양산하는 곳이 아니라는 인식이 서게끔 그 기능을 대행할 예술학교가 생겨야 하는 것이다. 문화부가 추진중인 국립예술학교와 그와 유사한 학교가 시급히 생겨나야할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다음,누구나 원한다해서 조치훈·정명훈이 될 수 없듯 또 그럴 필요도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함께 받아들여야 한다. 올림픽경기장에서 태극기를 올리는 메달리스트의 영광도 좋지만 스포츠의 정신과 국민보건,그리고 사회체육·생활체육이 우리에겐 더욱 긴요한 것이다.
같은 이치로 음악과 미술,예술을 사랑하며 예술문화에 기여할 인재 양성기관으로서 대학의 존재는 나름대로 가치를 지녀야 한다. 역설적으로 말한다면 세계적 피아니스트가 되길 스스로 포기한 학생이 음악문화와 음악교육을 위해 음악대학에 진학해야 하고 입시의 평가방법과 기준도 여기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
이강숙 교수의 표현을 빌린다면 음악교육에는 연주를 하는 「음악행」이 있고 작곡을 주로하는 「음악작」이 있으며 음악이론·교육·비평을 하는 「음악지」가 있는 것이다.
컨서버토리형태의 음악·미술·무용학교가 「행」에 속하는 실기위주 교육전문기관이라면,음악·미술·체육대학은 「작」과「지」,그리고 부속적 「행」을 가르치는 대학으로서 역할분담을 해야하고 학생들의 선발평가방식도 여기에 따라 달라져야 할 것이다.
예술교육에 대한 사회의 잘못된 기대 인식을 더욱 왜곡하고 오도한 교육행정가나 예술교육 전문가들은 차제에 뼈를 깎는 자기성찰을 거쳐 잘못된 교육체제를 바로 잡는데 헌신적 노력과 지혜를 제시해야 할 것이다.<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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