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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싱가포르에 투기가 없다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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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서민들에게 주택을 값싸게 공급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외국 사례를 인용할 때에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 또 외국 사례를 국내에 적용할 때는 우리의 현실을 냉정히 살펴야 한다. 일부 정치인.언론들은 싱가포르가 마치 부동산 투기가 없는 천국인 듯 얘기한다. 그러나 싱가포르에서도 부동산 투기는 주기적으로 일어난다. 특히 민간주택 부문은 투기꾼들의 천국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부동산 양도차익에 대한 세금이 없고, 아무리 많은 주택을 가져도 문제가 되지 않는 데다 분양권 전매도 무한정 가능하기 때문이다.

싱가포르 모델을 얘기하려면 부동산시장의 이중 구조와 이를 유지하는 정부 당국의 철학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싱가포르 정부는 건국 초 80%가량의 토지를 국유화해 정부가 토지 소유 및 운영권을 거머쥐었다. 그리고 이 기반 위에서 값싼 국민주택과 산업단지를 공급해 왔다. 정부가 국민주택을 공급한 가장 큰 이유는 이 나라가 이민자들로 구성된 사회이기 때문에 이들에게 집을 소유하도록 함으로써 국가의식을 심어주는 데 있었다. 집 문제가 안정되면 국민이 생업에 매진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고려도 물론 있었다.

싱가포르의 국민주택 부문에선 투기가 일어나기 힘들다. 정부가 땅값을 통제하고 주택청이 주택 공급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요 부문에서도 내국인들이 한 채씩만 줄 서서 사도록 제한돼 있다. 그렇지만 싱가포르 정부는 개인과 국가의 부(富)를 늘리는 방안으로 점진적인 주택가격 상승을 선호한다. 또 민간주택.국민주택의 격차가 너무 벌어지지 않도록 민간주택 가격의 상승에 맞춰 국민주택 공급가격도 올려 왔다.

반면 민간주택 부문은 시장에 맡긴다. 특정 지역 주택가격이 얼마나 오르건, 누가 얼마나 이득을 남기건 정부가 간여하지 않는다. 외국인들에게도 제한이 없다. 외국인들도 최고 80%까지 은행대출을 받아 주택을 살 수 있다. 싱가포르 중심가인 오처드거리 주변에는 최근 부동산시장 회복세를 타고 40층 이상의 초호화 아파트들이 올라가고 있다. 이렇게 새로 짓는 아파트들이 분양가를 단계적으로 높이면서 주택시장 붐을 주도하고 있다.

민간주택 부문에 간섭하지 않는 것은 여기에는 어차피 돈이 있는 사람들이 들어오고, 이들의 수요 공급에 맡기는 게 낫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맨해튼이나 베벌리힐스의 집값이 아무리 올라도 미국 정부가 간섭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싱가포르 모델을 거론하는 사람들은 이분화된 주택시장을 전체적으로 살피기보다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부분만 부각시키는 것 같다. 싱가포르식으로 값싼 국민주택을 공급하려고 하더라도 국내에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우리는 국유지 비율이 30%밖에 되지 않고, 그나마 도시용지 중에서 공공부문이 보유한 비율은 0.1%밖에 되지 않는다. 국민주택을 공급하려면 대부분 민간 소유 토지를 보상해야 한다. 싼 가격에 이 땅을 제공하려면 정부가 땅 임대료의 상당 부분을 보조해 줘야 한다.

수요 측면에서도 좋은 위치에 국민주택이 들어오면 이를 비싸게 주고 사려는 사람이 전국에서 몰려온다. 인구 300만 명밖에 되지 않는 싱가포르에서는 별문제가 없을지 몰라도 인구 4700만 명이 넘는 한국에서는 이 수요를 어떻게 줄 세울 것인지도 생각해 봐야 한다. 잇따라 발표된 부동산 대책들은 정부가 간여하지 않아도 될 부분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과민 반응하고 정작 간여해야 할 부분에서는 비현실적인 것 같다.

신장섭 싱가포르 국립대 교수·경제학 KDI 국제정책대학원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