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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집건너 하나 꼴...40년 부통의 한의원 본고장|250여 곳 모두"손가락 청진기"자랑|일제 땐 약전골목...희귀 약재 집산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7면

『쯔쯔쯔…. 기(기)가 허(허)여. 보(보)를 혀야 쓰것네.』
『삼백(삼백)을 삼가야해. 먼고 하니 흰쌀밥·흰 설탕·흰 조미료. 이 세 개는 당뇨·고혈압·심장병 등 모든 성인병의 근원이 되는 거여.』
종로5가에서 동대문까지 1km남짓.
한집건너 하나 꼴로 늘어서 있는 한의원이 모두 2백50여 곳.
약탕기에서 새어나오는 알싸한 한약냄새가 하루종일 떠나지 않는 종로보약거리다.
『일제 때는 약전으로 불렸지. 대부분 건재 약방 도매상들로 전국의 희귀한 약재가 몰려들었어.』
H한의원 김정기 원장(78)은 50년 가까이 이 거리를 지켜온 터줏 대감.
일단 맥을 짚으면 병명을 어김없이 알아내는「손가락 청진기」소유자다.『옛날에는 고마움의 표시로 쌀 한 됫박, 콩 한말을 놓고 갔지. 요즘은 돈으로 의술을 사려는 사람이 많아 섭섭해.』
종로 보약거리가 본격 형성된 것은 6·25동란 직후인 53년 말.
『국민의료법이 개정되면서 한약방이 사라지고 한의원이 들어섰지요. 초창기엔 2O여 곳쯤 됐을 겁니다.』
한때는 한약방에서 진맥·조제도 했으나 금지되면서 대부분 한의사를 고용해 한의원을 경영하거나 떠돌이 한의사로 변신했다는 종로구 한의사협회장 이병택씨(57·M한의원 원장)의 증언이다.
『비록 80년대 들어 순전히 교통 편이성 때문에 경동시장 부근 제기동일대에 4백여 곳의 한의원이 형성돼「최대」의 자리는 넘겨줬지만 한의의 본고장으로서 명성만큼은 역시 종로』라고 주장했다.
이 거리의 한의들은 대부분 50대 이상.
진찰법은 아직도 경험에서 전수된 사진오음 법(사진오음 법)이 주류.『얼굴빛이 누르면 거의 황달이고 희면 폐병이지. 오장(오장)의 이상에 따라 목소리도 다르고.』
보고(망) 묻고(문) 듣고(문)맥박을 재는(절진)4진법에 궁상각치우의 5음계로 병세를 깊어낸다는 것.
그러나 이 거리에 최근 젊은 한의사들이 첨단 의료장비를 무기로「무서운 아이들」로 떠오르고 있다.
K한의원 유미후 원장(35·여)은 홍일점으로 증조부·조부·부친이 모두 한의(한의).
D병원에 레지던트로 근무중인 양의(양의)남편과 의견교환도 하며 과학적 문명기계를 도입, 진찰에 이용하는 실용주의자다.
이들 젊은 한의원들은 대부분 1억∼2억원을 호가하는 전세보증금을 낼수 없어 고용의사로 일한다. 보수는 월 1백50만원선.
특히 K대 출신이 주류를 이뤄 지방의 W대나 타 대학 출신이 발붙이기 힘들다.
이 거리를 찾는 환자들은 대부분 중년층.
80%이상이 부인 네 들이다.
뚜렷이 아픈 증세가 있어서라기보다「예방」차원에서 찾는다는 H한의원 김흥중 원장(57)의 설명.『60년대까지 만해도 치료목적이 많았으나 양 의사에게 밀리고 또 소득수준이 높아지면서 7O년대 이후는 주로 보약손님이지요.』
무턱대고 인삼·녹용을 넣어달라고 할 땐 그냥 돌려보낸다는 김 원장은『체질에 따라 인삼이 독(독)이 될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보약 값은 내용물에 따라 천차만별.
일반 보약은 한재에 6만∼7만원 선이지만 녹각이 들어가면 2만∼3만원쯤 비싸고 녹용이 첨가되면 최저 15만원에서 35만원까지 호가한다.
물론 산삼·서각(물소 뿔)등이 들어가면 부르는 게 값.
『바쁜 현대인들이 일일이 약을 달여먹기 힘들잖아요.』
이곳 한의원들은 보약을 지어주는 일이외에도 요즘 약탕기를 갖추고 병 또는 비닐팩에 담아 간편하게 먹을수 있게 해준다.『최근엔 고교생환자가 부쩍 늘었어요.』
고3병이 심각하다는 H한의원 김 원장은『식보(식보)가 약보(약보)보다 낫다』며 『제때 밥 잘먹고 운동하는 게 보약』이라고 했다.
이 거리 한의원들의 가장 큰불만은 의료보험.『첩약은 제외되고 26종류의 처방, 68종의 가루약만을 지정, 현실에 맞지 않아요.』
침의 경우 2백50원정도로 수가가 싸게 책정돼 아예 무료시술을 해주는 곳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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