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장규칼럼

또 다른 "잃어버릴 10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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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한국을 찾는 외국인들이 "물가가 왜 이리 비싸냐"는 불평을 많이 한다. 우리 스스로도 외국 여행을 다니다 보면 국내 물가가 얼마나 높은지를 실감한다. 호텔 방값이나 주택비는 말할 것도 없고, 월급쟁이들의 점심값에 이르기까지….

원래 물가 비싼 나라를 꼽자면 일본이 세계적으로 악명이 높았었다. 한국의 3배, 동남아의 10배라는 것이 정설이었다. 요즘 일본에 가 본 사람이라면 "천만의 말씀"이라는 소리가 절로 나올 것이다. 소득 대비를 따지지 않더라도 물건값 자체가 한국보다 싼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일본 물가는 내리고 한국이 오른 데다가, 환율까지 가세하는 바람에 일본 가서 쇼핑하는 재미가 새로운 화젯거리로 등장하는 판이다.

어쩌자고 세상이 이처럼 뒤바뀌고 있는 것일까. 못사는 사람들이 자기 동네 물건값이 비싸다고 부자 동네로 쇼핑하러 다니는 격이니, 코미디 같은 이야기다. 그러나 이 코미디가 눈앞의 현실이다. 햄버거값도, 커피값도, 옷값도 일본보다 한국이 비싼 경우가 허다하다. 넥타이.스카프 등 명품 브랜드의 액세서리는 거의 일본에서 사는 게 싸다. 한국의 수입 자동차값은 아무리 세금 탓을 해도 말도 안 되게 더 비싸다. 호텔 식사가 1인당 10만원을 훌쩍 넘는 게 예사다. 100달러를 넘는다는 이야기다. 여기에다가 평당 5000만원짜리 아파트에, 100만 달러가 넘는 골프장 멤버십까지 운운하면 참으로 가관이다.

물가가 올라도 너무 올랐다. 이러고도 경제가 멀쩡하면 그게 비정상이다. 부자들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비싸 봤자 있는 돈 몇 푼 더 주면 그만이다. 더구나 외국이 더 싸면 비행기 타고 나가 사 올 수도 있다. 해외관광 붐은 오래된 이야기다. 국내보다 싼 골프장은 동남아에만 있는 게 아니다. 요즘은 부자 나라 일본 골프장조차 한국보다 훨씬 싸고 좋다. 나도 친구들과 지난 추석 연휴에 일본 구마모토에 골프여행을 갔었는데 깜짝 놀랐다. 숙박과 두 끼 식사, 골프비용 일체에 한국돈 10만원꼴이었다. 이러니 일본 골프여행이 인기를 끌 수밖에. "한국 손님들 덕분에 요즘 들어 경기가 눈에 띄게 좋아졌다"고 호텔 종업원은 말했다.

이러니 밖으로, 밖으로만 나간다. 국내에선 비싼 값에 공연한 눈치까지 살펴야 하는데, 밖에 나가면 눈치 볼 필요도 없고 값도 싸니 마음껏 사고 쓰고 하는 것이다. 공장은 공장대로 해외로 빠져나가고, 소비는 소비대로 남의 나라 가서 써댄다. 망할 징조다.

일본도 1980년대까지 비슷한 병을 앓아 왔었다. 국내 소비 촉진을 위해 정부가 상품구매권을 나눠주기까지 했지만 사람들은 그걸 할인한 돈으로 동남아 쇼핑을 즐기는 바람에 말짱 헛일이었다. 그러나 90년대의 '잃어버린 10년'을 거치면서 어렵사리 병을 고쳤다. 부동산 버블이 꺼지고 유통업체들의 도산이 줄을 잇는 고통의 기간이었다. 결정적 역할은 중국으로부터의 '저가 공습'이었다. 중국 제품이 밀물처럼 들이닥치면서 고물가체제의 근간이었던 해묵은 유통 구조가 급기야 무너져내렸던 것이다. 백화점과 전통의 유통업체들이 수도 없이 망했지만 그 대가로 고물가병을 고치면서 지금의 회복 전기를 만들어낸 셈이다.

김대중.노무현 정권 10년간 경제가 어려웠다 해서 "잃어버린 10년"이라고들 한다. 혹자는 정권이 바뀌면 자연히 경기가 회복될 것이라는 근거 없는 기대론을 펴기도 한다. 유감스럽게도 전혀 그럴 것 같지 않다. 도리어 일본의 경우처럼 진짜 "잃어버린 10년"을 겪지 않겠나. 부동산 폭등이 그렇고 중국의 공세가 그렇다. 특히 향후 5년 내에 벌어질 메이드 인 차이나의 저가 공세는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하이얼의 전자제품이 어떤 위력을 떨칠지, 중국산 자동차는 언제부터 서울 거리를 휩쓸지. 한국 경제는 또 다른 "잃어버릴 10년" 속으로 빨려들어 가고 있는 것만 같다.

이장규 중앙일보 시사미디어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