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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은 서로 통하니까요

중앙일보

입력


"정통 발레가 비보이(B-boy)를 만났습니다."
이정희 한국현대춤연구회장은 이달 말 차이코프스키의 무용극 '호두까기 인형'을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무대에 올린다. 중앙대 교수를 역임한 이 회장은 30여 년간 현대춤을 안무하고 춤춰 온 정상급 무용가다. 실험적인 무용도 여러 번 시도했다. 그러나 비보이와의 만남은 처음이다. 이 회장은 보름 앞으로 다가온 공연을 앞두고 설렘과 두려움에 들떠 있다. 이 회장의 호두까기 인형은 21, 22일 오후 7시30분 분당 계원예고의 벽강예술관에서 선보인다.

이 차이코프스키 발레는 크리스마스 시즌이면 세계무대의 단골 작품이다. 이 회장은 정통 발레에 비보이와 팝핀(Pop pin: 관절을 튕기면서 추는 로봇춤)을 보탰다. 그는 "고전발레 음악에 맞춰 현대 춤, 특히 비보이 춤을 안무하는 것이 여간 힘들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지난 여름부터 한시도 집을 떠나지 못했다. 하루종일 차이코프스키 곡을 들으며 그에 맞는 춤 동작을 구상하느라 진땀을 뺐다. 그 동작을 자신이 직접 시연해 보고 수정을 거듭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1시간 10분동안 진행되는 무용극 안무를 며칠 전에야 겨우 마칠 수 있었다.

이 회장은 분당 정자동 불곡산 기슭의 단독주택에 산다. 요즘 이 집 지하실에 마련한 무용실은 열기로 후끈거린다. 쌀쌀한 바깥 날씨가 무색하다. 비보이와 발레 무용수들이 어울려 연습에 한창이다. 뜻밖에 비보이 몸동작이 자연스럽게 작품 속으로 스며든다.
이 회장은 "정통 발레에 현대 춤을 연결시키는 일은 완전히 새로운 창작"이라며 "우리나라에선 처음 있는 일"이라고 했다.
호두까기 인형은 1892년 러시아에서 초연된 이후 100여 년간 여러 나라에서 열두가지 버전으로 바뀌어 안무됐다. 각 나라의 문화적 특성이 반영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아직 그런 시도는 없었다. 크리스마스 때마다 국립극장·예술의 전당 등 전국 무대에 '호두까기 인형'이 오르지만 외국 무용가들 안무를 그대로 사용했다. 이 회장은 "일부에선 우리의 시도를 부질없는 짓으로 여길지도 모른다"며 "그렇지만 모든 분야서 변혁이 이뤄지는 21세기를 사는 현대무용가로서 고전발레를 현대 춤으로 재해석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호두까기 인형은 여주인공 클라라가 크리스마스 이브에 선물로 받은 호두까기 인형을 안고 자다 꾸는 꿈이 주 내용이다. 인형은 왕자로 변해 클라라를 괴롭히는 못된 인형들을 물리친다. 서로 사랑을 느낀 클라라와 왕자는 듀엣춤을 추며 행복함에 젖지만 꿈을 깨보니 왕자는 인형일 뿐이었다.
비보이는 여주인공을 괴롭히는 인형들로 출연한다. 비보이와 발레의 만남은 뮤지컬 '비보이를 사랑한 발레리나'에서도 시도됐지만 이번처럼 비보이가 고전음악에 맞춰 춤을 추진 않는다. 댄스경연대회서 여러번 우승한 분당의 비보이 팀 'DNB크루'가 열연한다. 각기춤으로도 불리는 팝핀을 추는 4명이 함께 나온다. 마술사도 등장한다. '헬로우 매직' 대표마술사 이제민씨가 호두까기 인형 등에 생명을 불어 넣는 역할을 맡는다.

이처럼 '이정희 버전' 호두까기 인형 무용극은 볼거리가 풍성하다. 이 회장은 "정통발레와 달리 어린이·청소년들도 지루하다는 생각없이 즐길 수 있다"며 "가족이 함께 재미있게 볼 수 있는 현대판 발레"라고 말했다.
이 회장은 비보이들처럼 거리 춤에 익숙한 무용가다. 그는 현대춤을 거리로 몰고 나온 '원조격' 무용인이다. 1984년 아파트단지·덕수궁·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등에서 '거리의 춤', 국립극장 놀이마당에서 '봄날 문밖에서 춤'을 선보였다. 그는 또 실험적 안무가다. 대표작으로 꼽히는 '살푸리 아홉' 에서 광주민주화운동, 분단문제 등 비극적 현대사를 무용으로 표현했다. 그는 지난 9월 열린 제1회 성남국제무용제 예술총감독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이 회장 가족은 모두 예술인이다. 이번 무용극에도 가족 2명이 참가한다. 한국예술종합학교 3학년인 큰 딸 이루다씨는 여주인공 역을 맡았다. 영화 '하늘정원'을 감독했던 남편 이동현씨는 무용극 배경 영상물을 제작했다. 막내 딸도 계원예고에서 무용을 배우고 있다.
호두까기 인형 역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전문사(석사)과정의 오영훈씨가 맡았다. 오씨는 중앙대 재학 시절 23회 전국대학무용경연대회서 대상을 차지한 무용계 재원이다.
이 회장은 22일 오후 4시 문화소외계층인 소년가장 등 불우이웃들을 위한 공연을 별도로 준비했다. 그는 "호두까기 인형이 분당의 대표적 현대 무용극으로 자리잡도록 온힘을 쏟겠다"며 "매년 새롭운 모습으로 무대에 올리겠다"고 밝혔다. 관람문의 031-712-0501.

프리미엄 조한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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