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여의사가 찾던 평양 간 아버지 유학생 김경봉씨는 북한 과학계의 거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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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끔하게 가르마를 타고 해맑은 웃음을 짓고 있는 20대 동양인 청년. 아버지는 그렇게 빛바랜 흑백사진 속에만 계셨다. 독일 유학 시절인 1956년 위장병으로 병원을 찾았다가 간호사였던 어머니를 만나 나를 낳은 뒤 북한으로 돌아가 연락이 없다. 스물넷 꽃다웠던 어머니가 올해 일흔넷. 50년 동안 가슴에 묻어뒀던 아버지는 아직 살아 계실까. 어엿한 의사로 자란 딸이 이젠 주름져 있을 손을 한번이라도 잡아보고 싶어한다는 걸 알고 계실까….

북한인 아버지 '김경본(1929년생)씨'를 찾고 싶다고 본지에 사연을 전했던 우타 안드레아 라이히(48.여.의사)가 염원을 이루게 됐다.<11월 29일자 11면>

아버지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 우타 안드레아 라이히가 1950년대 말에 촬영한 아버지 김경봉씨 사진을 들고 있다.베를린=유권하 특파원

부친의 북한 내 행적이 확인된 것이다. 45년 전 생이별한 북한인 남편을 애타게 찾는 독일인 레나타 홍(69) 할머니보다 먼저 뜻이 이뤄진 것이다.

정부의 대북 소식통은 4일 "라이히가 찾고 있는 아버지 '김경본'은 북한과학원장을 역임한 '김경봉(77)'"이라며 "61년 10월부터 북한과학원에서 근무, 94년까지 실장과 원장을 지낸 데 이어 2002년까지 '자연에너지개발이용센터' 국장으로 재직했다"고 전했다. 이 소식통은 "그는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8, 9기 대의원과 당 중앙위원(88년)을 역임했으며, 과학 분야 발전에 대한 공로로 92년 '김일성 훈장'과 2002년 김정일의 감사장을 받았다"고 덧붙였다. 이 소식통에 따르면 김경봉은 북한에서 영화배우 출신인 처와 아들을 데리고 평양에서 살았다고 한다. 소식통의 전언은 라이히가 알고 있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과 일치한다.

◆ 딸 라이히의 아버지 김경봉에 대한 기억=라이히에 따르면 김경봉씨는 드레스덴 공대에서 무기화학을 공부하고, 프라이베르크 광산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혼인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58년 라이히가 태어나자 김씨는 결혼해 아내와 딸을 북한으로 데려가고 싶어했다. 그러나 당시 북한 유학생이 외국인 아내를 얻는다는 것은 당국의 눈초리 때문에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라이히 어머니의 친정도 외동딸을 낯선 나라로 보내고 싶어하지 않았다. 결국 김씨는 혼자 북한으로 떠났다.

이후 독일의 모녀는 김씨로부터 편지 한 통 받지 못했다. 68년 평양에서 외교관을 하던 동창을 통해 김씨가 결혼해 자식을 낳고 평양에서 잘 산다는 소식을 접한 어머니는 미련을 버렸다고 한다. 보관해오던 사진과 보내지 못한 편지 등을 모두 태웠다. 하지만 81년 라이히가 동베를린의 북한 대사관을 통해 아버지를 찾겠다고 나서자 어머니는 적극 만류했다고 한다. "평양의 아버지에게 나쁜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이유였다. 홀로 딸을 키우며 쌓였을 애환과 원망보다 사랑했던 이에 대한 그리움과 배려가 컸던 것이다.

하지만 중앙일보(11월 14일자 1,5면) 보도를 통해 레나테 홍 할머니의 사연이 알려지자 라이히는 "낳아준 분의 생사라도 알고 싶다"며 다시 용기를 냈다. 김경봉의 생존 여부와 관련해 대북 전문가들은 "북한 내 요인이 숨졌을 경우 언론 매체에 부고가 나 파악되는데 그런 정보가 입수되지 않은 만큼 살아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아버지의 행적을 들은 라이히는 "살아 계신다니 너무 가슴이 떨린다"며 "중앙일보 보도를 계기로 주변에 수소문을 하다가 아버지가 2002년 이탈리아 코모에서 열린 에너지 개발에 관한 국제 세미나에 참석했다는 소식도 전해들었다"고 말을 잇지 못했다.

김성탁 기자, 베를린=유권하 특파원

◆ 레나테 홍 남편 소식 추적 중=독일에 유학한 북한 출신 홍옥근씨와 결혼한 지 1년 만인 61년 북한 당국의 강제 소환에 따라 남편과 헤어진 뒤 홀로 두 아들을 키워내며 45년째 남편을 찾고 있는 독일인 할머니. 여전히 남편의 성을 쓰는 그의 사연이 본지에 보도되자 독일 현지 언론이 대대적으로 다루며 상봉을 추진하고 있다. 우리 정부도 홍옥근씨의 소식을 추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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