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청산… 한일 새출발 행보/가이후 일 총리 방한의 배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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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한인지위」개선·일­북 접촉 설명/무역역조 시정·기술협력엔 선 그을 듯
가이후(해부준수) 일본 총리의 방한은 지난 88년 9월 다케시타(죽하등) 전 총리의 방한 이래 2년 4개월만에 이뤄지는 것으로 「한일 새시대의 개막」을 함께 선언한 노태우 대통령의 지난해 5월 방일에 대한 답방성격을 띠고 있다.
그러나 「냉전시대의 종결」로 상징되는 전후질서의 재편기에 일본의 국제적 역할,특히 동북아 신질서 구축에 강한 의욕을 보이고 있는 일본 지도층의 대 한반도전략의 일환이라는 점에서 가이후 방한의 속뜻을 풀이하는 시각도 있다.
가이후 총리의 방한은 오는 13∼20일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 5개국 순방,3월 부시 미 대통령의 방일,4월 중순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의 방일 등으로 이어져 전지구적 규모의 정상회담과 연결돼 있으며 이달 하순에는 북한과의 국교정상화를 위한 본회담을 앞두고 있다는 점에서 크게 주목된다.
가이후 총리는 방한을 앞두고 7일 오전 총리관저를 방문한 이원경 주일대사와의 회담에서도 방한배경에 대해 설명하는 가운데 양국의 파트너십을 특히 강조했다.
가이후 총리는 『이번 한일 정상회담에서 아시아­태평양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한일 양국이 파트너(동반자)가 되는데 큰 성과가 있기를 기대한다』고 밝혔고,이대사는 『가이후 총리의 방한으로 한일 양국간 과거문제를 청산,새로운 한일관계 설정을 위해 노력하자』고 말했다.
이와 관련,한일 양국의 바람직한 장래를 검토해온 「한일 21세기위원회」가 최종보고서를 작성,양국 정부에 건의할 내용도 가이후 총리의 방한을 염두에 두고 이뤄졌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가이후 총리가 이틀의 빡빡한 일정속에 대일 항쟁의 상징적 장소인 서울 종로의 파고다공원을 방문한다거나,노대통령 주최만찬회 석상에서 다시 「식민지배에 대한 사과와 반성」의 뜻을 밝히기로 한 것도 이번 방한으로 『과거는 떠내려보내고 미래를 위해 협력하자』는 일본 지도층의 「과거청산의지」를 한국민에게 밝히는 의식으로 극화하려는 의도가 숨어있다.
가이후 총리의 방한을 계기로 오는 16일이면 기한만료가 되는 재일한국인의 법적지위문제도 어느정도 정치적 해결을 봐 종결짓고 한국과의 사전의견조정 없이 밀고나간 일­북한 관계정상화의 교섭진전상황도 한국측에 알려 양해를 구하는 일도 이번 가이후 방한의 큰 과제다.
그러나 지문날인의 즉시 철폐 또는 대체방법 개발까지의 유예조치를 바라는 한국측의 요구가 받아들여질 기미를 보이고 있지 않은데다 지방공무원 채용 및 국공립교사 채용에 대한 소위 국적조항 철폐도 실현가능성 없이 넘겨질 공산이 커 한국측과의 「과거문제 청산 대타협」은 이루어지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노대통령은 지난해 10월 가네마루(금환신) 전 부총리에게 ①북한에 국제원자력기구(IAEA) 핵사찰수용 권고 ②대 북한 경제협력이 군사력강화로 이어지지 않도록 보증한다는 등 5대원칙을 밝혀 북한과의 관계정상화가 남북대화의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해줄 것을 바란바 있다.
이같은 한국측의 희망이 이번 가이후 총리의 방한중에 다시 강조되겠지만 일본이 대한 정책에서 「북한카드」를 쓰고 있으며 「통일이 일본의 장래에 불리하다」는 관점에서 남북한의 등거리 정책을 쓰기 시작했다는 시각도 한국측에 나타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밖에 무역역조 개선문제나 기술협력 등 경제차원의 한일 협력도 이번 정상회담에서 한국측이 중요시할 것은 확실하나 「한국측의 구조개선노력이 필요하다」「민간차원의 문제」로 일본이 한계를 그을 것이 분명해 진전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보다는 이면에서 진행될지도 모를 아키히토(명인) 새 일왕 한국방문 타진,일본 영화·가요의 수입개방,경부고속전철의 대일 발주협력 약속,나아가 일본측의 「아시아 안전보장 협력체 제안」에 대한 한국측의 동의 등 주요 현안들이 숨어 있으리라는 일부 관측도 무시할 수 없다.<동경=방인철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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