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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면당한 직업병 호소(촛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2면

『조기에 직업병 판정을 받아 치료와 요양을 할 수 있었다면 이렇게 어이없는 죽음만은 면했을 겁니다.』
6일 오후 10시 서울 상봉동 제세병원 영안실.
병명도 모른채 시름시름 앓다 5일 숨진 (주)원진레이온 퇴직근로자 김봉환씨(53)의 주검앞에서 유가족과 원진레이온 직업병 피해노동자협의회 회원 10여명이 분노에 떨고 있었다.
『불치의 직업병인 이황화탄소 중독증세를 호소하는 전·현직 근로자를 외면하는 회사와 노동부의 처사가 이런 결과를 초래한 겁니다.』
김씨가 회사를 그만둔 것은 입사한지 4년만인 83년 9월.
인견사 원료인 비스코스를 만드는 원액2과에 근무했던 김씨는 심한 두통과 손의 마비증세로 더이상 일을 할 수 없었다.
한푼의 보상도 받지 못한채 쫓겨났지만 가정형편상 병원진단도 받지 못하고 한의원에서 침을 맞는 것이 치료의 전부였다.
『왜 아픈지도 모르면서 남편의 병은 악화돼 갔어요.』
부인 방희녀씨(55)는 문득 남편 김씨의 병이 이황화탄소 중독증세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
같은 회사 방사과에서 10년동안 근무했던 동생(43·여)과 동료근로자 10여명이 지난해 8월 이황화탄소 중독 직업병 판정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지난해말 병원을 찾은 김씨의 1차검진 결과는 이황화탄소 중독의증. 퇴직후 7년만에 알아낸 병명이었다.
그러나 산재요양치료를 받게 됐다는 기대도 잠시였다. 비유해부서 근로자였다는 이유로 회사가 김씨의 검진결과를 인정하지 않아 직업병 판정을 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5일 오후 김씨는 치료 한번 제대로 받지 못한채 쓰러져 영영 일어나지 못하고 말았다.
『회사와 노동당국이 고통을 호소하는 우리의 외침을 계속 외면하는한 김씨의 죽음은 반복될 수 밖에 없습니다.』
한 퇴직근로자의 노기띤 말에서 근로자의 생명에 대한 인식이 결핍돼 있는 우리 노동현실의 단면을 보는 것 같았다.<김남중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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