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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성 회복을 위한 캠페인/사람답게 사는 사회:4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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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우선 팔고보자” 속임수 예사/상도의 증발/“이핑계 저핑계” 고장수리 외면/유명사도 버젓이 「눈가림 판매」/작년 소비자고발 5,417건이나
서울 신월동 A연립에 사는 주부 이모씨(34)는 올 연말연시를 어떻게 보냈는지 모른다.
겨울들어 가장 춥다는 강추위가 닥친 세밑 집안에 설치한 새 보일러가 다섯번째 고장이 나 온 식구가 추위에 떨며 새해맞이를 해야했기 때문이다.
이씨가 구입한 가스보일러는 손꼽는 대기업체인 L사제품. 「최고성능에 아프터서비스보장」이라는 선전을 믿고 55만원 주고 설치한 것이 지난해 11월말. 그러나 보일러는 가동에 들어가자마자 고장을 일으켰다. 12월 중순까지 세차례나 회사측에서 나와 수리를 했으나 보일러는 추위가 닥친 세밑에 네번째·다섯번째 고장을 잇따라 일으켜 이씨가족의 연말연시를 망쳐놓고 말았다.
이씨는 새해 업무가 시작된 3일 「소비자문제를 연구하는 시민의 모임」에 L사를 고발했다.
서울 신림동의 주부 남모씨(33)는 외판원이라면 이젠 대문조차 열어주지 않는다. 매일같이 보도되는 낮털이 강도나 성폭행범죄도 범죄지만 지난해 가을 W화학 판매사원 2명이 강제로 떠맡기고간 물건을 돌려주느라 너무도 애를 먹었기 때문이다.
당시 판매사원들은 『개당 1만3천원인 샴푸·린스·보디클린저 12세트를 팔아주면 냄비세트 2박스를 사은품으로 주겠다』고 했다.
남씨는 살 생각이 없다고 딱잘라 거절했으나 이들은 『일단 사은품을 보면 마음이 변할 것』이라며 아기의 이름을 적은 뒤 상품을 강제로 떠맡기고 가버렸다.
남씨는 곧 W화학에 연락,물건을 가져가도록 요청했다. 그러나 회사측에서는 『담당자가 부재중』이라는 이유로 접촉을 피했고 오히려 물품대금 15만6천원을 납부하라는 지로용지를 보내왔다.
결국 남씨는 한국소비자보호원에 W화학을 고발,그 단체의 도움으로 9월에 떠맡았던 물건을 3개월만인 12월 초순에야 돌려 줄 수 있었다.
『회사가 물건을 많이 팔려는 것이야 당연하지만 싫다는 물건을 소비자에게 억지로 떠맡기고 돈을 내라는 것은 무슨 경우입니까. 작은 회사도 아니고 이름을 알만한 제법 큰 회사마저 이 모양이니….』
좋은 물건을 적정이문을 붙인 합리적인 값에 팔되 계약을 성실히 지키고 판 물건에 대해서 끝까지 책임을 지는 「상도의」는 우리 사회에서 좀체 찾아보기가 힘들다.
허위·과장광고로 소비자의 눈과 귀를 속이고 사술·위계까지 동원한 판매작전으로 물건을 떠맡기되 값은 폭리일수록 좋고 한번 팔면 그뿐 뒤책임은 모르겠다는 식의 한탕주의 상거래가 판을 친다.
지난해 봄 「백화점 쇠고기 사기판매」는 우리사회 상도의의 수준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국내 유명백화점들이 수입쇠고기를 한우로 속여 그럴싸한 포장으로 눈가림해 팔다 적발돼 말단 실무자들만 몇몇이 구속됐다.
수원 단위농협이 중국산 참깨 15t을 수입,참기름 2홉들이 2만2천5백병(시가 1억3천5백만원)을 만들어 국산이라 속이고 2년동안 수원시내 부녀회등에 팔다 지난해 3월에야 적발된 사건에 이르면 「믿을 곳이 어디도 없다」는 생각이 절로 들 수밖에 없다.
지난해 시멘트 품귀현상때 나타났던 사재기와 웃돈거래,가짜 벌꿀,가짜 김포쌀,가짜 영광굴비 등 온통 「사이비」 천지다.
YMCA 시민중계실 이덕승 간사(37)는 『이는 한국경제가 국가주도 아래 「성장」「사업자」 중심으로 발전한 탓에 무엇이 「공정」이고 무엇이 「불공정」인지 모르는데서 기인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소비자문제를 연구하는 시민의 모임」에 접수된 소비자고발·상담건수를 보아도 88년 2천2백88건이던 것이 89년 4천32건,지난해는 5천4백17건으로 지속적인 증가추세를 보여왔다. 소비자들의 권리의식이 높아진 탓도 있지만 밑바닥에 떨어진 상도의를 실증해주는 숫자다.
지난해 접수된 5천4백17건은 「방문강제판매」가 9백4건으로 전체의 16.7%를 차지해 단연 으뜸이었다.
다음으로 ▲약효능이 없거나 부작용 사례 12.4% ▲가전제품 불량·교환거부 10% 순이었다.
경제기획원 공정거래위원회는 상거래에서 불공정거래 유형으로 담합에 의한 거래거절,지나친 경품제공 등 부당한 고객유인,다단계판매(몇개를 팔면 특혜를 준다는 방식을 반복하는 판매) 등 위계에 의한 고객유인,상대제품에 대한 비방광고 등 25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한국소비자연맹 정광모 회장(62)은 『시장경제에서 기업의 경제윤리와 도덕성은 기초를 이루는 덕목이며 이는 기업 자체의 노력과 함께 정부의 지도,그리고 깬 소비자들의 조직적인 감시운동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라고 진단했다.<정선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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