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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공동체 무너지면 모두 설 땅 잃는다|인륜마저 저버린「끔찍한 일」예사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7면

올림픽을 치르고 한때 선진도약의 보랏빛 기대에 부풀었던 우리사회가 그로부터 3년이 채 안된 이제 총체적 난국을 거쳐 「범죄와의 전쟁」에 들어섰다. 정치는 국민의 불신과 조소의 대상이 되어있고 경제는 좀처럼 재도약의 기력을 못 찾는 가운데 과소비·사치풍조·향락과 퇴폐·범죄는 넘쳐나 민생은 불안하고 시민들의 마음은 어둡다. 지난 30년에 걸친 경제건설 총력전 끝에 세계 12위의 무역대국, 세계 15위의 경제규모 신흥산업국, 1인당 GNP 6천달러선의 중진국이 되였는데도 우리들은 보릿고개의 가난보다 더한 마음의 가난으로 불만과 불평, 원한과 분노가 가득하다. 무엇보다 도덕성의 위기로 일컬어지는 규범의 붕괴, 윤리의식의 마비는 공동체해체의 위기감조차 안기고 있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우려와 각성이 각계에서 여론을 이루어 가는 것은 당연하지만 다행스런 일이다. 도덕성의 위기 원인은 무엇이며 극복의 방안은 무엇인지 함께 생각해보는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주)
사람은 왜 사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삶의 의미는 무엇이며 행복이란 과연 어떤 것인가.
사춘기소년들의 것임 직한 원초적 의문이 21세기를 바라보는 90년대 초입 우리사회 시민들의 가슴에 새삼스런 의념의 안개로 피어오르고 있다.
인생에 눈뜨는 10대의 순수한 번민도, 영원을 향하는 철학자의 심오한 사색도 아니다. 「보통사람」들이 일상에서 느끼는 절박한 삶의 회의이며 생존의 위기의식이다.
매일같이 예사로 벌어지는 온갖 흉악한 범죄와 패륜행위, 그 끔찍한 결과에 비해 너무도 어이없고 하찮은 동기, 오직 더 많은 소유와 향락만을 좇는 무한탐욕의 충돌, 양보 없는 집단이기주의의 갈등, 마약범람, 청소년탈선, 어디서나 마주치는 인간성 상실과 규범붕괴현상에 대한 자연스런 반응이며 자기성찰의 반문이다.
최근 몇 달 새 보도를 통해 전해진 일련의 범죄와 사건들만으로도 그 같은 시민들의 불안과 회의가 얼마나 크고 넓고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것인가를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툭하면 목숨 뺏어>
공중전화를 오래 쓴다고 항의하는 주부를 칼로 찔러 살해한 10대가 있는가하면 단돈 몇 십 만원을 뺏기 위해 어린이까지 포함해 일가족을 생매장한 일당이 있었고, 친누나의 딸을 유괴해 살해하고 2천만 원을 요구한 2O대 동생에, 사업자금을 안 준다고 할아버지를 폭행해 숨지게 한 손자, 불량배 아들의 행패를 견디다 못해 목 졸라 살해한 아버지….
한방에 하숙하는 대학선후배끼리 방 청소문제로 다툼을 벌이다 선배가 후배 칼에 숨졌고, 여고생 딸과 딸 친구를 술집에 팔아 넘긴 아버지, 역시 딸을 윤락가에 만 어머니가 경찰에 붙들렸다. 택시운전사가 임신중인 주부승객을 성폭행 하는가 하면 중학생이 여자친구를 인신 매매해 검거됐다.
경찰관이 가짜맥주공장을 운영하고 교도관이 죄수들에게 술·담배를 팔고, 공무원들끼리 짜고 군 유지를 부정 불하한다. 엉터리상장으로 승진한 선생님에, 돈주고 산 가짜 박사학위로 행세를 해온 저명인사. 폭력배와 어울린 판·검사가 옷을 벗은 뒤 교도소에 수감된 조직폭력배들이 검사를 협박하는 어처구니없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 모든 현상은 무엇을 말하는가.

<위기감 폭발 상황>
송복교수(연세대·행정학)는 『우리사회는 현재 공동체의 사실상 해체상태이며 문제의 핵심은 도덕성의 위기』라고 진단했다. 사회의 성원들이 공동체를 유지해 가기 위해 마땅히 지켜야할 최소한의 기본윤리마저 외면하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가족·이웃·친우·직장·학교 등 모든 공동체가 제 기능을 못하는 가운데 「전 국민의 이방인화」현상이 벌어져 도덕성의 위기가 한계상황에까지 증폭되고 있다고 송 교수는 분석했다.
한상진 교수(서울대·사회학)도 우리사회의 도덕성위기가 전반적인 현상이며 심각하게 우려할만한 상태라는데 견해를 같이했다. 현재의 상태대로 간다면 공동체의 해체가 불가피하다고 우려했다.
두 교수의 지적대로 도덕성의 위기는 우리사회 전반에 걸쳐 요란한 적색경보를 울리고 있다.
정치권에 정치도의가, 공직사회에 공직윤리가, 생산현장에는 경제윤리·근로윤리가, 학원에는 사제의 도리, 가정에서 예의범절, 거리의 교통질서와 공중도덕에 이르기까지 가치질서와 규범이 실종된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다.
과소비·투기·향락·퇴폐풍조·마약범람·범죄창궐 등 현상은 그 같은 도덕성 위기의 서로 다른 표출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결과는 어찌될 것인가. 역사의 교훈은 자명하다. 도덕적으로 타락한 사회가 스스로의 힘으로 생존을 유지한 예는 없다. 번영을 누리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스스로 책임져야>
안충영 교수(중앙대·경제학)는 이와 관련,『정직을 바탕으로 국제경쟁에 도전하는 기업가 정신과 생산현장에서 자기가 맡은 공정에 끝까지 책임을 지는 근로정신의 복원 없이는 우리경제는 현재의 난국을 타개할 수 없을 것』 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우리사회가 그나마 의지하고 있는 자그마한 경제적 성공조차도 성장의 한계에 부닥쳤다는 지적이다.
「강대국의 흥망」연구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석학 폴케네디는 21세기 세계를 주도할 국가는 건전한 경제와 함께 건전한 윤리와 도덕적 기반을 갖춘 사회라고 결론짓고 있다.
공동체의 먼 장래까지 가지 않더라도 시민개개인의 일상의 안락과 행복을 위해서도 이제는 우리 사회 모든 부문에서 마비된 양심을 일깨우고 도덕성의 회복을 서둘러야만 한다.
최근 한국 갤럽연구소가 발간한 「한국인의 인간가치관」보고서는 이점에서 충격을 던진다. 한국인은 세계 18개국의 조사대상 국민가운데 인생에 대한 자신감·생활만족 도에서 최하위를 나타낸 것으로 나타났다. 조사대상의 61%가 인생이 허무하다고 응답했고 66%가 외로움을 느낀다고 응답했다는 보고다. 미국·일본·멕시코 등 다른 나라의 2O%내외 비율에 비해 3배 이상 높은 것이다.
그 같은 염세 감정은 우리사회의 무 규범 상태, 도덕성의위기와 결코 무관할 수가 없다. 한마디로 살맛이 안 나는 사회에 우리는 살고있고 책임의 상당부분은 시민들 스스로가 질 수밖에 없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쓸 것인가.
많은 학자들은 인간의 도덕성을 능력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양심은 발달하는 특성을 보인다고 말한다.
이 같은 관점에서 문룡린 교수(서울대·교육학) 는 황금만능 물질주의 같은 총론 적·원론적 분석과 대응은 별 의미와 실효가 없으며 이제는 비도덕 행위를 유형화해 그에 맞는 대응방안이 마련되어야한다고 강조했다.
문 교수는 학자들의 분류를 원용해 비도덕 행위를 관습이전·관습·관습이후 3수준으로 나누고 ▲충동에 의한 행위 ▲벌을 피하고 복종하기 위한 행위 ▲이기적 욕구에 의한 행위 ▲친애주의 때문에 저지르는 행위 ▲법질서나 사회전체를 위한다는 명분에 따른 행위 ▲사회계약 또는 자연 법적 관점에서 저지르는 행위 ▲보편적 문리원칙에 입각한 행위 등 유형별 대응을 주장했다.
그리고 이 모든 유형에 공통으로 적용될 수 있는 대책으로 사회전반의 스트레스와 긴장의 정도를 낮추기 위한 노력의 강화와 지역주민간 접촉확대, 학교교육의 개선 등을 제시했다.

<청사진 제시 시급>
한상진 교수는 우리사회 도덕성 위기의 핵심은 개인이든 집단이든 간에 전체나 상대방에 대한 균형 감각 없이 눈앞의 이익에만 집착하는 극단의 이기주의에 있다고 지적하고 이는 미래에 대한 믿음이 약화되면서 더욱 심화된 측면이 강하다고 풀이했다.
따라서 정치권·정부등 사회의 지도그룹이 밝은 내일에의 청사진을 제시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시급하다는 견해다.
송복 교수도 지도층의 역할에 큰 중요성을 두었다. 대중의 이기심을 지도층의 공익 심으로 방향을 잡아줄 때만 사회발전이 가능한데 우리의 현 상황은 지도층조차 이기심을 넘어 극단의 이기주의에 빠져있어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는 시각이다.
송 교수는 지도층의 솔선수범에 더해 가정과 학교가 도덕교육의 장으로서 기능을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어떤 방식으로든 더 이상 우리공동체의 붕괴가 방치되어서는 안 된다.
여자들이 밤길을 마음놓고 걸을 수 없고, 어린 생명이 하찮은 탐욕의 제물이 되는 사회는 아무리 높은 물질적 풍요를 누려도 결코 문명한 사회라 할 수 없다.
도덕성 회복은 사람답게 살기의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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