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 "아·태지역 폐쇄적 동맹 유해"…시진핑 "다자주의 지켜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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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 푸틴(왼쪽) 러시아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이 16일 중국 베이징에서 회담 중 서명한 문서를 교환하면서 악수하고 있다. 타스=연합뉴스

블라디미르 푸틴(왼쪽) 러시아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이 16일 중국 베이징에서 회담 중 서명한 문서를 교환하면서 악수하고 있다. 타스=연합뉴스

중국을 국빈 방문 중인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 직후 “러시아·중국 관계는 기회주의적이지 않고 누군가에게 적대적이지도 않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의 폐쇄적인 군사·정치 동맹은 유해하고 비생산적”이라고 비판했다. 한·미·일 안보 협력, 오커스(AUKUS, 미국·영국·호주 안보협력체) 등을 통해 미국이 벌여 온 대(對)중 견제 활동을 겨냥한 발언으로 보인다. 미 정부가 중국산 전기차, 배터리 등에 '폭탄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방침을 밝힌 직후 열린 이번 정상 회담을 통해 러시아와 중국이 '공동의 적' 미국을 향해 결속을 과시하는 모양새다.

푸틴 대통령은 이날 약 2시간 30분 동안 이뤄진 확대 정상회담을 마친 뒤 기자회견에서 “회담 분위기는 따뜻하고 동지적이었다”며 양국의 유대감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양국은 국제기관의 탈정치화를 요구하고 있다”며 중국과 세계무역기구(WTO)·주요 20개국(G20) 개혁을 요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유라시아 지역에서 통합을 진전하기 위해 유라시아경제연합(EAEU·러시아가 주도하는 경제 협력체)와 일대일로(一帶一路, 육·해상 실크로드)의 잠재력을 결합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시 주석 역시 “중국과 러시아는 유엔 중심의 국제 체제와 국제법에 기초한 세계 질서를 굳건히 수호하고 유엔, APEC, G20 등 다자기구에서 입장을 긴밀히 협력하고 있다"며 "중국과 러시아는 진정한 다자주의를 통해 다극화 세계 형성과 경제 세계화 과정을 촉진하고 있다“고 역설했다.

블라디미르 푸틴(왼쪽) 러시아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이 16일 중국 베이징에서 정상회담을 마친 뒤 발언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블라디미르 푸틴(왼쪽) 러시아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이 16일 중국 베이징에서 정상회담을 마친 뒤 발언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두 정상은 우크라이나 전쟁 문제도 논의했다.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위기를 해결하려는 중국 노력에 감사하다”고 말했다. 시 주석은 ”중국과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위기를 해결하는 올바른 방법은 정치적 해결이라고 인식하고 있다”며 “푸틴 대통령과 나는 팔레스타인-이스라엘 갈등 해결의 시급성과 유엔 결의안을 이행하면서 (두 국가 해법) 공식에 기초한 팔레스타인 문제 해결의 필요성에 주목했다“고 전했다.

양국 정상은 이날 오전 11시(현지시간) 인민대회당 동문 광장에서 21발의 예포가 울리는 가운데 군 의장대 사열과 분열을 포함해 15분여에 걸친 공식 환영식을 가졌다. 환영식 후 푸젠팅(福建廳)에서 열린 소인수 회담에서 시 주석은 그간 푸틴과 40여 차례 만나 긴밀한 소통을 이뤘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중·러 관계의 계속된 발전은 두 나라와 국민의 근본적 이익에 부합할 뿐만 아니라 지역과 세계의 평화·안정·번영에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이어 “새로운 여정에서 중국은 러시아와 협력해 좋은 이웃, 좋은 친구, 좋은 동반자로 세계의 공평과 정의를 수호하겠다”고 덧붙였다.

16일 오전 블라디미르 푸틴(오른쪽) 러시아 대통령과 시진핑(왼쪽) 중국 국가주석이 베이징 인민대회당 동문 광장에서 3군의장대를 사열하고 있다. 타스=연합뉴스

16일 오전 블라디미르 푸틴(오른쪽) 러시아 대통령과 시진핑(왼쪽) 중국 국가주석이 베이징 인민대회당 동문 광장에서 3군의장대를 사열하고 있다. 타스=연합뉴스

푸틴 대통령은 시 주석을 “친애하는 친구”라고 부르면서 “지난해 3월 주석에 당선되자마자 모스크바를 방문했고, 우리는 서로의 첫 해외 방문을 하는 좋은 전통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지난해 양국 무역은 약 25% 증가했다고 밝히면서 "자국 통화로 결제하기로 한 러시아와 중국 당국의 시기적절한 결정이 무역을 강화시켰다”고 자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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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세계정세에서 우리의 협력은 국제무대에서 주요 안정 요인 중 하나”라며 “함께 다극적 현실을 반영하고 국제법에 근거한 정의롭고 민주적인 세계 질서 원칙을 옹호한다”고 했다. 이날 소인수회담에서 중국 측은 정치국 상무위원인 차이치(蔡奇) 중앙판공청 주임, 딩쉐샹(丁薛祥) 부총리, 왕이(王毅) 외교부장, 장궈칭(張國淸) 부총리, 허리펑(何立峰) 부총리가, 러시아 측은 최근 국방부장에서 연방안전보장회의로 자리를 옮긴 세르게이 쇼이구 의장과 세르게이 라브로프 외교장관이 함께 했다.

16일 오전 중국 베이징 천안문 앞을 국빈방문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아우루스 전용차 행렬이 지나고 있다.  CC-TV 캡처

16일 오전 중국 베이징 천안문 앞을 국빈방문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아우루스 전용차 행렬이 지나고 있다. CC-TV 캡처

회담을 마친 뒤 시 주석과 푸틴 대통령은 공동 성명 등 각종 문서에 서명했다. 이어 양국 수교 75주년 기념식과 양국 문화의 해 개막식에도 참석했다. 양 정상은 공원 산책을 겸해 비공식 대화를 나눈 뒤 양측 대표단이 참석하는 비공식 만찬에 참석했다.

푸틴 대통령은 이날 베이징 일정을 마치고 두 번째 방문지인 하얼빈으로 이동한다. 하얼빈에서 중·러 박람회, 중·러 지역협력 포럼 개막식에 참석하고, 하얼빈 공대와 최근 복원된 동방정교 성모수호성당을 방문한다.

푸틴 대통령의 방중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미국이란 ‘공동의 적’을 두고 공고해지고 있는 양국의 결속을 보여준다는 평가다. 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두 정상이 만난 건 이번을 포함해 벌써 네 번째로, 푸틴은 지난해 일대일로 포럼 참석 이후 7개월여만에 다시 중국을 찾았다. 다섯 번째 임기 시작 후 첫 해외 방문이다. 중국중앙방송(CC-TV)은 “우크라이나 전쟁 위기 속에서 양국간 실질적 협력을 강화하는 게 이번 방중 핵심 의제”라고 전했다.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외교ㆍ경제적으로 고립된 러시아에겐 중국과 관계 설정이 무엇보다 중요한 상황이다. 러시아는 중국의 지원에 기대 미국과 유럽 등 서방의 제재를 극복해 왔다. 러시아는 중국이 에너지와 천연자원을 사주고, 반도체와 공작기계·광학장치 등 민간용으로 개발ㆍ제조됐어도 군사용으로 활용될 수 있는 이중용도 물품을 수출하면서 전쟁을 지속할 동력을 얻어왔다.

중국 입장에서도 미국이 중국산 전기차, 배터리 등에 폭탄 관세를 부과하는 등 대미 갈등 양상이 심화하는 가운데 ‘우방’ 러시아의 존재가 필요하다. 뤄밍후이(駱明輝) 싱가포르 난양공대 교수는 연합조보에 “푸틴은 이번 방중을 통해 반도체를 비롯한 중국산 핵심 소재 수입과 자국 에너지 수출 관련 협상을 진행해 전쟁을 치르는 러시아에 대한 중국의 경제적 지원을 늘리는 것을 노리고 있다”며 “중국 역시 대만해협과 남중국해 등 미국과의 지정학적 대치 상황에서 러시아의 지원을 계속 받기를 희망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만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양국 관계가 시험대에 올랐다는 평가도 나온다. 푸틴 대통령으로선 지난 2022년 양국이 체결한 양국 간 ‘제한 없는’ 파트너십 협정에 대한 실질적인 결과물을 확보하는 데 힘쓰려 하겠지만 중국 입장에선 이중용도 제품 수출을 비판하며 새로운 제재를 경고하는 미국의 위협 속에 서방과의 추가 대립을 피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중국 해관총서에 따르면 양국간 교역액은 지난해 2400억 달러를 돌파하며 최고 기록을 세웠지만, 올 들어 4월까지 중국의 대러시아 수출은 전년 같은 기간과 비교해 1.9% 감소했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중국 인민대학교 금융연구소가 발표한 보고서를 인용해 미국 제재가 가중되면서 올 들어 3월까지 러시아·중국 간 결제의 약 80%가 중단됐다고 보도했다.

뉴욕타임스(NYT)는 “시 주석과 푸틴 대통령은 공동 전선에 있으나, 아젠다는 다르다”며 “더 많은 군사적 지원을 원하는 러시아와 달리 중국은 치명적 무기를 제공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라고 말했다.

왕이웨이(王義桅) 인민대 국제문제연구소 소장은 “ 중국은 전쟁을 벌이는 러시아에만 자신들이 묶여 있는 것처럼 보이기를 원하지 않는다”며 “유럽을 포함한 다양한 파트너들과 함께 다극화 세계를 구축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SCMP도 ‘이중 용도 물자’의 수출에 대해 중국이 어떤 태도를 보일 지가 이번 회담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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