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적어줬다, 70대에 ELS 판 은행 65% 배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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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금융감독원이 홍콩 H지수 기반 주가연계증권(ELS)의 손실 대표사례에 대한 배상 비율을 처음 공개했다. ELS 배상을 놓고 고민 중인 은행권에 일종의 ‘모범 답안’을 제시한 것이다. 금감원의 구체적 배상 비율이 나오면서, 은행권도 이를 바탕으로 자율 배상에 본격적으로 나설 것으로 보인다.

13일 금감원은 금융분쟁조정위원회(분조위)를 열고 5개 은행(KB국민·신한·하나·NH농협·SC제일)의 대표 ELS 손실 사례 대해 배상비율을 30~65%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김주원 기자

김주원 기자

앞서 금감원은 지난 3월 은행권 검사 결과를 바탕으로 ‘ELS 분쟁조정기준안’을 발표했었다. 당시에는 금융사별로 불완전 판매책임을 물어 기본배상 비율과 상황별 배상 비율 가감 기준을 공개했다. 이번에 나온 배상비율은 이 기준을 5개 은행별 대표사례 1개씩에 적용해 구체적 배상 정도를 산출한 것이다.

이번 5건의 사례의 은행과 투자자는 20일 이내에 해당 조정안을 수락해야 조정이 성립된다. 만약 조정안을 거부하면, 소송 등을 통해 배상 비율을 다시 다퉈야 한다. 이번 조정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던 다른 사례는 은행이 금감원 조정안을 바탕으로 배상 비율을 구체적으로 정해 자율 배상에 나설 예정이다.

배상 비율은 기본 배상 비율에 사안별 배상 비율 가감 항목을 더해 정해졌다. 우선 금감원은 5개 은행 모두가 ELS 판매 과정에서 손실 위험을 누락하거나 왜곡해 설명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판단했다. 예를 들어 판매 과정에서 과거 ELS 투자로 손실을 본 사례를 설명할 때, 20년이 아닌, 10년이나 15년 내의 사례만 제시하면서 돈을 잃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식으로 홍보했다.

이렇게 하면 2008년 미국발(發) 금융위기 당시 손실 사례가 빠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안전한 상품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이에 따라 금감원은 은행들의 설명의무 위반을 물어 지난 2021년 이후 가입자 모두에게 최소 20%의 기본 배상 비율을 일괄 설정했다. 여기에 KB국민·NH농협·SC제일은행은 투자성향분석을 형식적으로 하거나 가입자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ELS 상품을 권유해 금융소비자보호법(금소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적합성의 원칙도 위반했다고 금감원은 판단했다. 이 때문에 이들 은행에서 금소법이 시행된 2021년 3월 25일 이후 ELS에 가입한 사람은 기본 배상 비율을 30%까지 일괄 적용받을 수 있다.

이렇게 적용한 일괄 기본 배상 비율에 사안별로 배상 비율이 추가로 가감된다. 금감원이 지난 3월에 발표한 기준에 따르면 ▶예·적금 가입목적(10%포인트)으로 방문했다가 ELS에 가입했거나 ▶만 65세 이상 고령층, 은퇴자, 주부 같은 금융취약계층(5%포인트) ▶ELS 최초투자(5%포인트) ▶서류상 서명 누락(5%포인트) 등을 인정받으면 배상비율이 추가로 더 올라간다. 반면 과거 ELS 투자 경험이 21회 이상이거나 가입금액이 5000만원을 초과하는 등의 사례에 해당하면 배상 비율을 일부 차감한다.

구체적으로 암 보험 진단비를 정기예금에 넣으려는 고객에게 ELS를 권유한 KB국민은행 사례는 60% 배상 비율이 결정됐다. KB국민은행은 암 보험 진단비 4000만원으로 정기예금하러 온 고객에게 ELS 권유했다가 1900만원 손실이 나 문제가 됐다. 또 가입 서류에 실제 서명 대신 ‘서명’이라는 글자만 기재한 신한은행 사례는 55% 배상 비율이 이번에 결정됐다. 70대 고령자의 청약저축 해지 자금으로 ELS에 투자하도록 권유한 NH농협은행은 65% 배상 비율을 제시받았다. ELS 통장 겉면에 ‘2.6%’라는 예·적금 금리로 오해할 수 있는 수치가 기재된 점이 고려됐다. 고객에게 손실 위험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 투자 목적 및 경험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채 ELS를 권유한 하나·SC제일은행도 각각 30%와 55%의 배상 비율이 조정안으로 나왔다.

다만 배상 비율 가감 항목 적용이 사안별로 다르고, 기준도 모호해 자율 배상 과정에서 진통이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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