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제재 비웃듯…전쟁 중인 러 '중국 알리'서 반도체 사들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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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일 러시아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서 열린 2차세계대전 전승 기념일 리허설 행사에서 러시아 장갑차들이 행진 연습을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지난 5일 러시아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서 열린 2차세계대전 전승 기념일 리허설 행사에서 러시아 장갑차들이 행진 연습을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온라인에서 전자부품을 팔아 온 중국인 행크(가명)는 지난 2022년 4월 러시아 최대 전자상거래(이커머스) 플랫폼 OZON에 판매자로 등록했다.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서방 빅테크 기업이 러시아를 떠나던 시점이다. 무주공산인 시장에서 그는 몇 개월 만에 중국에서보다 3배나 큰 이윤을 낼 수 있었다. 행크가 판매한 제품 중엔 미국 반도체 기업 엔비디아의 그래픽처리장치(GPU), 인텔·AMD의 반도체가 있었다. 반도체는 서방이 러시아로의 수출을 통제하는 대표적 제품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생한 지 3년이 넘었지만, 이른바 ‘이중용도 물품’의 러시아 반입은 서방의 제재를 비웃듯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이중용도 물품은 반도체나 볼베어링처럼 민간용으로 개발·제조됐어도 군사용으로 활용될 우려가 큰 상품을 말한다.

러시아 최대 전자상거래 플랫폼 OZON. 사진 닛케이아시아 캡처

러시아 최대 전자상거래 플랫폼 OZON. 사진 닛케이아시아 캡처

핵심 공급지는 중국이다. 일본 닛케이아시아는 “행크와 같은 중국 이커머스 업자로부터 러시아가 공급받은 민간 전자부품이 (우크라이나) 전쟁터로 향하고 있다”며 “알리익스프레스 러시아(알리 러시아)나 OZON 등 러시아 이커머스 플랫폼에서 버젓이 거래되고 있다”고 전했다. 이들 플랫폼에선 반도체뿐 아니라 자동차, 모형 항공기 부품 등 드론과 미사일에 쓰일 수 있는 제품도 거래되고 있다.

러시아 이커머스 플랫폼은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서방의 제재가 심화하자 중국 시장과의 연계를 강화했다. OZON은 2022년 11월 광둥성 선전에 사무실을 열고 물류 시스템을 확충해왔다. 지난해 3분기부터 중국 이커머스 업체 징둥닷컴의 자회사 JD로지스틱스와 배송 계약을 맺었다.

한국에서도 공격적인 행보를 보이는 알리도 러시아 시장에서 인기가 많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알리 러시아의 시장 점유율은 20%에 육박하고 월간 사용자만 3500만명이 넘는다.

이들은 국제사회 제재 규정을 지키고 있다고 강조한다. OZON은 닛케이아시아에 “미국과 유럽연합(EU) 수출 통제 대상인 컴퓨터 반도체 및 기타 품목의 판매를 금지하고 있다”며 “이를 지키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통해 플랫폼 내 판매 제품을 모니터링하고 있다”고 밝혔다.

중앙처리장치(CPU)와 같은 반도체는 서방의 대표적인 대러시아 수출 통제 품목이다. 하지만 알리익스프레스 러시아에서 '인텔 CPU'라고 검색하면 버젓이 제품이 판매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진 알리익스프레스 러시아 캡처

중앙처리장치(CPU)와 같은 반도체는 서방의 대표적인 대러시아 수출 통제 품목이다. 하지만 알리익스프레스 러시아에서 '인텔 CPU'라고 검색하면 버젓이 제품이 판매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진 알리익스프레스 러시아 캡처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알리 러시아와 OZON 등에서 ‘인텔 CPU’ 등을 검색하면 관련 제품들이 지금도 버젓이 판매되고 있다. 행크는 “인텔과 AMD의 반도체를 (러시아) 시장에 파는 건 어렵지 않다”며 “서방이 감시하기 어려운 복잡한 구조를 가진 페이퍼컴퍼니를 중국 밖에 설립하는 걸 이용한다”고 말했다. 여기에 다른 나라에서 4~5회가량 사고파는 이른바 ‘세탁’ 과정을 거쳐 러시아로 제품이 들어온다. 사실상 원산지 추적이 불가능하다.

이런 과정을 통해 중국산 이중용도 제품은 러시아군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다. CNN에 따르면 지난해 러시아의 초소형 전자제품 수입 비중의 90%는 중국이다. 이들은 러시아가 미사일과 탱크, 항공기 등을 생산하는 데 쓰이는 필수 물품이다. 러시아는 탄약 및 포탄 생산을 급격히 늘리고 있는데, 여기에 쓰이는 핵심 재료인 니트로셀룰로즈도 대부분 중국산이다. 현재 러시아의 탄약 및 포탄 생산은 미국과 유럽보다 거의 3배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2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러시아 서부 니즈니타길에 있는 한 군수공장을 방문해 시찰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지난 2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러시아 서부 니즈니타길에 있는 한 군수공장을 방문해 시찰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미국은 러시아군이 최근 우크라이나에서 대규모 공세를 취할 수 있는 배경엔 중국의 지원이 있다고 보고 강력하게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지난달 24~26일 중국을 방문한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공작 기계, 초소형 전자기기, 광학 부품을 중국에서 러시아로 대량으로 들러가면서 러시아는 그 어느 때보다 빠른 속도로 군수품, 미사일, 장갑차 등을 생산했다”며 “이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대한 침략을 계속할 수 있게 해준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이러한 거래를 중단하지 않으면 (중국에) 취할 조치를 준비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이와 관련해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미국 정부가 러시아와의 무역 거래를 지원하는 중국 은행을 글로벌 금융 시스템에서 차단하는 제재를 검토하고 있다고 전했다.

미국의 경고에도 중국의 러시아 지원이 중단될지 여부는 불투명하다. 6일(현지시간) 파리에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시 주석이 이중 용도 제품의 러시아 수출을 엄격하게 통제하겠다고 했다”고 말했지만, 중국 정부는 이를 공식 확인하지 않고 있다. 중·러 간 밀착도 여전하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오는 15~16일 5선 성공 이후 첫 해외 방문지로 중국을 찾아 시 주석과 정상회담을 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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