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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정효식의 시선

민정수석 부활은 필요악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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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정효식 기자 중앙일보 사회부장
정효식 사회부장

정효식 사회부장

“군주는 사랑받는 것보다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편이 훨씬 안전합니다. 공포(fear), 결코 실패하는 법이 없는 ‘처벌에 대한 두려움’이 당신을 지켜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치 현실주의의 고전 마키아벨리 『군주론』의 유명한 문장이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 2년 만에 민정수석을 부활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떠올랐다. 윤 정부 초대 민정수석으로 서울대 법대 2년 후배인 김주현(63) 전 대검찰청 차장검사를 내정했단 보도도 나왔다. 무엇이 윤 대통령의 소신을 바꾸게 했을까.

“친인척 관리 없는 현 정부서 필요”
민심 정보와 사정 권한 남용 우려
공약 폐지 이유 국민에 설명해야

윤 대통령은 검사 시절 청와대 민정수석이란 자리를 곱게 보지 않았다. 권력의 검찰 통제 기구,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검찰 수사의 중립성과 독립성을 해친다고 생각했다.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는 말도 거기서 나왔다. 검찰총장 시절 ‘조국 수사’ ‘청와대 울산시장 선거개입 사건 수사’를 시작한 뒤 문재인 정권에서 이른바 친문·반윤 검사들을 대검찰청 부장 및 서울중앙지검장에 포진해 자신을 포위하는 등 인사 보복에 이어 지휘권 박탈과 감찰, 징계까지 하자 이런 생각은 더 강해졌다. 2021년 1~2월 ‘존경하는 대학 선배’인 신현수 전 민정수석과는 대검 참모진 등 검찰 인사를 협의했지만 당시 박범계 법무부 장관의 ‘인사 패싱’에 신 전 수석이 먼저 사의를 표명한 데 이어 윤 대통령 역시 총장직을 물러났다.

조국 전 민정수석을 포함한 문재인 정부 민정수석실과의 이같은 불화와 악연의 결과가 민정수석 폐지는 물론 ‘제왕적 대통령’의 상징인 청와대 해체, 비서실 축소, 대통령실 이전이라는 대선 공약으로 나온 것이다. 윤 대통령은 2022년 3월 14일 당선인 신분으로 인수위 집무실에 첫 출근해서도 “과거 사정기관을 장악한 민정수석실은 합법을 가장해 정적, 정치적 반대 세력을 통제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고, 세평 검증을 위장해 국민 신상털기와 뒷조사를 벌여왔는데 이런 잔재를 청산하겠다”며 폐지 공약을 거듭 확인했다. 그땐 “일명 사직동팀은 있을 수 없다”며 2000년 10월 김대중(DJ) 정부 시절 장관 부인 옷로비 의혹 사건을 계기로 해체된 청와대 하명사건 조사팀까지 거론했었다.

그랬던 윤 대통령이 지난 4·10 총선에서 ‘여당 108석 대 범야 192석’이란 참패 이후 수습책(?)으로 ‘민정수석 부활’ 카드를 꺼낸 것이다. 윤 대통령은 지난달 29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첫 영수회담에서 “국정을 운영하다 보니 정책이 현장에서 이뤄질 때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 민심 정보가 부족한 것 같다”며 “김대중 정부에서 처음에 민정수석실을 없앴다가 2년 뒤에 다시 만들었는데 이해 가는 부분이 있다”며 민정수석의 순기능을 거론하며 평가까지 달라졌다.

역대 정부에서 민정수석을 지낸 한 인사는 “순기능이 크다”고 강조하면서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도 민정수석이 있었다면 군 경찰과 경찰 간 교통정리가 법 절차대로 이뤄지고 외압 의혹의 소지가 원천 차단됐을 것”이라고 했다.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의 호주대사 임명 논란도 “출국금지는 민정수석실 인사검증 과정에서 걸러졌을 일”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하지만 “민정수석의 역할 중 내부 감찰이 가장 중요하다”며 “특히 현 정부에서 대통령 친인척 관리를 아무도 하지 않는 것은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실제 25년 전 김대중 전 대통령 때나 이번에도 민정수석 부활에 가장 큰 이유가 친인척 문제라는 것이다. 국민 모두 그렇게 인식한다. 윤 대통령이 민정수석을 부활하는 시점이 마침 총선서 승리한 야당이 채 상병 수사외압 의혹 특검을 시작으로 김건희 여사 명품백 수수 의혹 등 특검을 줄줄이 추진하고 있어서다. DJ는 부활한 초대 민정수석에 김성재 전 한신대 교수를 임명하며 “다른 건 부탁할 게 없고 우리 아들들과 친인척, 나와 가까운 사람들을 특히 관리 좀 잘 해주게”라고 부탁까지 했다. 이후 대검 중앙수사부장, 법무부 차관 출신 고위 검사를 민정수석에 임명했지만 임기 중 아들 셋 가운데 두 명이 각종 게이트에 연루돼 구속되는 것을 피하진 못했다.

민정수석은 민정(民情)과 사정(司正)이란 양날의 검을 동시에 갖는 자리다. 민심 동향에 관한 정보가 집중되는 동시에 검찰·경찰·국가정보원·국세청 등 이른바 권력기관을 관장한다. 특히 고위 공직자에 대해선 인사 검증 권한은 물론 직접 특별감찰반을 두고 감찰도 벌일 수 있어 ‘관가의 저승사자’로도 불렸다. 각각의 목적은 정당하고 순기능일 수도 있지만 대통령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과 친인척·측근 비호로 변질될 때 벌어진 일은 국정농단 수사를 이끈 윤 대통령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소신이 왜 바뀌었는지 국민에게 설명해야 할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