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野 싱크탱크는 전략 쏟아내는데…홍보가 84%, 위기의 '여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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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탄핵을 당한 야당 시절에도 정책 연구진은 최소 10여명은 됐는데, 지금은 4명이다. 싱크탱크라고 하기에 초라한 수준이다.”

4ㆍ10 총선 후인 지난달 26일 여의도연구원 노조가 낸 '여의도연구원 정상화를 위한 노동조합 입장문’ 중 일부다. 그간 여의도연구원의 실력은 정치권에서 정평이 나 있었다. 폭넓은 정보력과 정밀한 여론조사, 박사급 인력의 전문성이 어우러진 보고서는 다른 곳의 그것과 질적으로 달랐다. 그랬던 여의도연구원이 최근 몇 년 새 전혀 다른 평가를 받고 있다. 노조의 입장문은 그 단면이다.

지난달 25일 국민의힘 여의도 당사에서 '제22대 총선이 남긴 과제들'을 주제로 여의도연구원 토론회가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달 25일 국민의힘 여의도 당사에서 '제22대 총선이 남긴 과제들'을 주제로 여의도연구원 토론회가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여의도연구원의 전신인 여의도연구소는 1995년 한국 정당 최초의 정책 연구소(싱크탱크)로 문을 열었다. 차관급 대우를 명시한 박사급 연구위원 모집에는 200명이 넘는 지원자가 몰렸다. 보수정당의 브레인으로 선거전략과 정책 개발, 정세분석을 주도하며 2007년과 2012년 대선 승리의 초석을 놓기도 했다. 하지만 2016년 총선 패배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후 당이 침체하면서 여의도연구원도 함께 기울었고, 급기야 최근에는 “해체 후 다시 만드는 것이 낫다”는 비판까지 받고 있다.

①정책 연구는 뒷전, 업무 80%는 홍보

과거 여의도연구원의 보고서는 보수 정당 출신 대통령의 책상에 오를 정도로 영향력이 막강했다. 김영삼 정부 시절 연구위원은 당 정책위 회에 참석해 의견을 개진하고, 때로는 정책의 키를 쥐었다.

하지만 최근 3년간 여의도연구원의 활동 중 대부분은 정책 홍보에 집중됐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공개한 정책연구소 활동 실적에 따르면 여의도연구원의 지난해 활동 실적(921건) 중 83.7%(771건)가 정책홍보였다. 여의도연구원은 자체 홈페이지를 활용한 정책홍보 680건을 홍보 실적으로 보고했다. 연구개발 비중은 7.1%(65건), 보고서 등 자료 발간은 0.7%(6건)에 불과했다.

김경진 기자

김경진 기자

경쟁 상대인 민주연구원은 달랐다. 전체 활동 실적(325건)은 여의도연구원에 뒤졌지만, 정책 연구와 보고서 작성 비중이 높았다. 전체 활동실적 중 자료 발간(26.4%)과 연구 개발(23.7%)이 과반이었다. 정책홍보는 12.6%였다. 77건의 연구개발 중 ‘2030세대 전략 보고서’, ‘총선 대비 정책 전략 여론조사’ 등 13건이 4ㆍ10 총선을 위한 자료로, 세대와 지역별 유권자의 수요와 정치 성향을 읽고 정책으로 발전시켰다. 반면 여의도연구원은 65건의 연구 개발 중 선거 관련 주제로는 ‘청년 관련 이슈 빅데이터’, ‘ 빅데이터 후보자 경쟁력 분석 시스템 구축’이 전부였다.

총선 후의 처지도 정반대다. 민주당은 정권 심판론과 세대 확장론 등 총선 밑그림을 그렸던 민주연구원에 총선 백서 태스크포스(TF)를 꾸렸다. 반면, 여의도연구원은 평가 대상이 됐다. 국민의힘 총선백서TF는 2일 여의도연구원평가소위를 꾸려 선거 준비 과정부터 여의도연구원이 했던 역할과 기능을 살펴볼 방침이다.

②소속은 여의도연구원, 업무는 당에서

여의도연구원장을 지낸 지상욱 전 의원은 “자체적으로 정책을 생산할 인적 역량도, 정책 개발에 쓸 재원도 충분하지 않다”고 쓴소리했다. 정당에 지급되는 국고보조금의 30% 이상이 싱크탱크에 지원되지만 왜 돈이 없다는 볼멘소리가 나올까. 여의도연구원은 지난해 87억원을 받았다.

선관위에 따르면 지난해 여의도연구원의 석ㆍ박사 연구원은 39명으로 민주연구원(19명)보다 2배 이상 많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소속만 여의도연구원일 뿐 다른 일을 했다. 국민의힘은 각 상임위 전문위원과 당 정책국에서 일하는 직원 등을 여의도연구원 소속으로 두고 있다. "당의 인건비 지출을 줄이고 직원 채용을 늘리기 위한 꼼수"라는 것이 정치권의 시각이다. 여의도연구원 관계자는 “명목은 정책개발비지만 인건비 또한 정책 개발의 소요 비용으로 포함할 수 있어 전체 지출의 80~90% 정도가 월급으로 나간다”고 말했다. 여의도연구원 노조는 “박사 학위자는 1명뿐이다. 행정부서가 5명으로 정책 부서 인원(4명)보다 많다”고 지적했다.

여의도연구원 로고. 여의도연구원 제공

여의도연구원 로고. 여의도연구원 제공

③전리품으로 전락한 여의도연구원

여의도연구원장의 잦은 교체는 업무 연속성에 독이 됐다. 여의도연구원장이 당 대표의 전리품처럼 활용되면서 지도부가 바뀔 때마다 원장도 같이 바뀌었다. 2017년부터 지난해까지 9명의 원장이 거쳤지만 2년의 임기를 채운 사람은 지상욱 전 의원(2020년 6월~2022년 6월)이 유일했다. 9명의 평균 재임 기간은 8개월에 불과했다.

원장이 인사권을 가진 당 대표에게 종속되면서 대표의 눈치만 보는 부작용도 반복됐다. 총선 기간 국민의힘에서는 여의도연구원의 여론조사가 후보들에게 공유되지 않는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과거엔 ‘여의도연구원→사무총장→선거대책위원회’를 거쳐 지역구 여론조사가 개별 후보들에게 전달됐지만, 이번엔 ‘홍영림 여의도연구원장→한동훈 전 비상대책위원장’ 직보 체제로 운영됐다. 후보들 사이에선 "자체 조사 결과도 안 좋아 언론은 물론 개별 후보에게도 당 지도부가 공개를 꺼린다"는 말까지 나왔다. 이 때문에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선거 초반부터 판세를 적극적으로 공개한 민주당과 의석수 예측을 부담스러워하는 국민의힘이 대조되기도 했다.

원장을 지낸 한 의원은 “여의도연구원이 바로 서지 않으면 선거에서 이길 수 없다”며 “조직을 탈바꿈하려면 당 지도부 교체와 무관하게 독립된 이사회가 원장을 임명하고 임기를 보장하는 제도를 갖춰야 한다”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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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팀’ 역할하는 해외 싱크탱크…“재정·운영 자율성이 핵심”

지난해 9월 미국 싱크탱크 헤리티지재단이 공개한 ‘프로젝트 2025’ 보고서엔 올해 11월 미국 대선에서 공화당이 집권하게 되면 실천해야 할 국정과제가 담겨 있다. 한국 언론은 900여 쪽에 달하는 이 보고서를 인용해 “트럼프 행정부 2기가 들어서면 한국이 더 많은 방위비 분담을 요구받을 것”이란 취지의 보도를 쏟아냈다.

이처럼 미국엔 보수 성향의 헤리티지재단과 진보 성향의 브루킹스연구소가 쌍벽을 이뤄 앞다퉈 각종 정책 제언을 한다. ‘프로젝트 2025’에 단순히 학자뿐 아니라 트럼프 행정부 때 재임한 관료 다수가 참여한 것만 봐도 이들 싱크탱크의 제언은 상당한 무게감을 지닌다. 오바마 행정부 땐 피터 오재그 전 백악관 예산국장, 수전 라이스 전 유엔주재 대사 등 30여명의 브루킹스연구소 선임연구원이 정부로 옮겨 가서 직접 국정에 참여하기도 했다. 싱크탱크가 단순 연구에 그치는 게 아니라 정당의 인재 공급처 역할을 맡은 것이다.

이렇게 중요한 기능을 하면서도 운영의 자율성과 재정의 독립성을 지녔다는 측면에서 한국의 정당 싱크탱크와는 엄연히 다르다. 여의도연구원(국민의힘)과 민주연구원(더불어민주당)은 정당 산하단체인 동시에 국가로부터 보조금까지 받아 애초 자율성을 꿈꾸기 어려운 구조다. 이처럼 ‘같은 편’이면서도 ‘종속되지 않은’ 조직인 만큼 이들 미국의 싱크탱크는 자기 진영을 향한 쓴소리가 가능하다. 조직 내 취약점을 발견해 경고하는 일종의 ‘레드팀 역할’을 하는 셈이다.

독일에도 기민당 성향의 콘라드아데나워재단과 사민당 성향의 프리드리히에버트재단이 존재한다. 특정 정당과 이념적 가치는 공유하고 있지만 정당으로부터 독립됐다는 점에서 역시 한국의 정당 싱크탱크와는 다르다. 다만 미국과 달리 국가로부터 지원금을 받는 만큼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교육을 하는 역할이 강조된다. 한국처럼 나랏돈을 받으면서도 정당에 복속된 조직은 해외에서 찾기 힘들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2019년 발간한 ‘해외 국가 정당의 정책연구소 운영 현황과 한국에의 개선 방안에 관한 연구’에서 덕성여대 연구진은 “정당과 연계된 소속 현역 의원이 정책 연구원의 원장으로 임명되는 관행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며 “국가가 정당에 지급하는 보조금 중 정책연구소에 지급하는 금액을 (정당을 거치지 않고) 정책연구소에 직접 지급하는 제도적 개선 방안도 고민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현행 정당법은 정당에 지급하는 경상보조금의 30% 이상을 정당의 정책연구소에서 사용하게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결국 중앙당을 거쳐 돈이 지급되기 때문에 정책연구소가 자율성을 얻기 힘든 구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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