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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상재의 시선

골목길 다마스·라보 다시 보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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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이상재 기자 중앙일보 경제산업부디렉터
이상재 경제산업부디렉터

이상재 경제산업부디렉터

2021년 단종된 한국GM의 경상용차 다마스와 라보는 ‘자영업자의 발’로 불렸다. 작은 차체로 좁은 골목길을 누비는 실용성, 넓은 적재공간, 1000만원 안팎의 가격이 무기였다. 역사도 길다. 1991년 지금은 사라진 대우국민차가 일본의 ‘국민 경승합차’ 스즈키 에브리를 기반으로 다마스를 출시했다. 비슷한 시기에 경트럭 라보도 선보였다. 이후 30년간 소상공인과 자영업자의 생계수단으로 함께 했다.

다마스와 라보는 누적 37만 대가 팔렸다. 무게 400~500㎏짜리 상품을 싣고 근거리를 이동하는 데 이만한 차가 없다. 배기량 800㏄의 경차로 분류돼 개별소비세와 취·등록세가 면제다. 액화천연가스(LPG)를 사용해 유지비도 적게 든다. 세탁소나 꽃집, 배달음식점 등에선 이름 그대로 ‘가까운 친구’(다마스·스페인어)이자 ‘일꾼’(라보·그리스어)이었다.

2021년 단종된 ‘자영업자의 발’
중기가 인수했으나 설비 방치
민생 위해 지원강화 검토할 만

자영업자 입장에서 요즘 같은 고물가·고유가 시대엔 다마스와 라보가 더 아쉬울 수밖에 없다. 중고차 플랫폼 엔카닷컴에 따르면 두 차종은 최근 3년간 연평균 1500~1800대가 매매됐다. 단종 모델임에도 거래량이 꾸준하다. 지난달 2021년식 뉴 다마스 2인승 판넬밴DLX의 시세는 645만원으로, 전월 대비 1.41% 상승했다. 같은 연식의 뉴 라보 롱카고DLX는 전달보다 10.84% 오른 711만원에 거래됐다. 소상공인연합회 관계자는 “포터 전기트럭은 보조금을 받아도 2000만원대다. 금전적 부담도 큰 데다 차체가 불필요하게 커서 ‘대체 모델’이 못 된다”고 말했다.

관련 업계에 따르면 국내 경상용차 수요는 연 2만~3만 대다. 나름 탄탄해 보이지만 현대자동차나 기아 같은 대형 회사한테는 매력적인 숫자가 아니다. 국내에서 자체 개발한 경상용차 브랜드는 거의 없다. 다마스의 빈자리를 놓고 기아 레이, 현대차 캐스퍼 밴 등이 경쟁하고 있지만 적재중량이 떨어진다는 평이다. 중국에서 조달한 배터리나 부품으로 일부 중소업체가 경형 전기트럭을 내놨으나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경형 트럭 판매 대수는 지난해 103대, 올해는 3월 말 기준 1대에 그쳤다(한국자동차모빌리티산업협회).

이 틈새를 겨냥해 김경수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가 창업한 퓨처이브이가 전기 상용트럭을 개발 중인데, 당초 올 하반기였던 양산 시기를 내년 10월 이후로 늦췄다. 김 교수는 “기술·안전 인증 및 투자 유치가 이뤄지고 있는 단계”라고 말했다. 요컨대 대기업에는 작고, 중소기업엔 버겁고, 소상공인만 속 타는 시장인 셈이다.

그러면 다마스와 라보는 어디로 갔을까. 다마스·라보 생산 설비는 경북 김천의 일반산업단지에 4년째 방치돼 있다. 한국GM 창원공장에 있던 설비를 에스에스라이트라는 중소기업이 2021년 인수해 이곳으로 옮겨왔다. 에스에스라이트는 산단 내 1만6500㎡(약 5000평) 부지에 110억원을 들여 전기차 전용 플랫폼을 구축하고, 다마스와 라보를 각각 전기밴, 전기트럭으로 전환한다는 구상이었다. 이 회사 조정필 대표는 “당초 전기차 플랫폼을 깔고, 부품 공급사들이 조립을 맡아 월 300대, 연 4000대가량 생산할 계획이었다”고 말했다. 일자리 100개가 늘어날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다.

이런 청사진은 실현되지 못했다. 자금 여력이 빠듯해서다. 배출가스 자기진단장치, 헤드레스트(머리 지지대), 에어백 등 주요 환경·안전 규정에 도달하려면 연구개발 투자가 필수였다. 아무리 생계용이라고 해도 안전이 최우선이다. 한국교통안전공단에 따르면 2022년 화물차 교통사고 치사율은 2.6%로 승용차(0.92%)에 비해 2.8배였다. 사실 이런 위험성은 진작부터 지적됐지만 정부가 소상공인 수요를 고려해 단종 유예기간을 수차례 연장했고, 한국GM은 주판알을 튕기다가 매각을 결정한 것이다.

정부의 소극적인 대응을 아쉬워하는 목소리도 있다.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소상공인 지원 차원에서 경상용차 시범사업을 추진했으면 보급 속도가 지금보다 빨랐을 것”(김경수 교수)이라는 주장이다. 조정필 대표는 “수십억원을 들여 설비를 이전했는데 가동 한 번 못했다. 규제 샌드박스(한시적 규제 유예)라도 적용되기 바란다”고 했다. 소상공인연합회 회장을 지낸 최승재 국민의힘 의원은 “정부·지자체가 지원해 안전·환경 기준에 부합하는 제품을 개발하되 생산은 중소기업이, 품질보증과 서비스는 대기업이 맡는 방식도 고려할 만하다”고 제안했다.

지난 총선에서 여야는 경쟁하듯 포퓰리즘 공약을 쏟아냈다. 영수 회담에서도 민생 최우선에 인식을 같이했다. 이런 ‘선한 의지’를 600만 자영업자 발이 돼주는 차량 지원책에서 시작하면 어떨까. 물론 투명하고 엄격한 기준을 전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