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정운찬 칼럼

진정한 자유주의와 창의적 국정 운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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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전 서울대 총장

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전 서울대 총장

제22대 총선 다음날 미국에 사는 친구로부터 오랜만에 메일이 날아왔다.

자업자득, 사필귀정. 그는 윤석열 정권의 총선 패배에 아쉬움을 표하면서도 윤 대통령에게 책임을 돌렸다. 그 친구는 나보고 다른 정당도 마음에 안 든다며, 왜 이렇게 한국 정치가 엉망이냐고 물었다.

이번 선거는 국민이 공천 부조리 등 도덕적으로 타락한 야권을 비판하려다가도 여권의 독선을 더 준엄하게 심판한 것이다. 현상적으로만 보면 마치 우리 국민이 정치권의 심각한 부도덕을 용인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내면에는 ‘정부와 여당의 무능과 독선에 오죽 넌더리가 났으면 부도덕함을 알면서도 야권을 찍어 주었을까’라는 개탄이 자리하고 있다.

무능·독선 국정 실망해 야당 찍어
참패 후에도 사과 진정성 안 보여
경제적 강자-약자 균형 도모하고
인적 쇄신으로 다양성 추구해야

윤석열 정부의 오만은 총선 참패 후에도 멈추지 않았다. 윤 대통령은 국민에 대한 사과를 국무회의 모두발언으로 대신했다. 기자회견을 열고 직접 질의응답을 받았어야 했는데 안타깝다. 그뿐만 아니라 사과의 진정성이 안 보였다. 국정의 방향은 옳았으나 국민이 알아듣지 못한다는 게 말이 되나. 더 가관인 것은 국무회의 사과가 부족했다고 비판이 일자 주변 사람들이 나서 사과 발언을 보충 설명하는 식으로 넘어가려고 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국민의 마음을 읽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국민을 가르치려 들지 말고 국민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 그러자면 국민이 마음속에 담아 둔 말을 낮은 자세로 경청하고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모인 민의에 기초하여 국민 다수의 삶이 나아지는 방향으로 국정을 운영하고, 의견을 달리하는 개인과 집단은 설득을 통해 동참을 끌어내는 리더십을 보여줘야 한다. 국정운영의 결과도 중요하지만 그 과정도 그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중요하다.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이번 선거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는 물가, 크게는 경제였다고 한다. 지금 민생은 도탄에 빠졌고 한국 사회는 유례없는 양극화에 시달리고 있다. 호화 명품 매장은 북적이지만 서민경제는 바닥이다. 코로나 여파가 아직 가시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언제까지 코로나 타령만 할 수는 없다. 윤석열 대통령은 경제정책의 기조를 바꿔야 한다.

윤 대통령은 후보 시절부터 친기업적인 제스처를 취해왔다. 그는 기업의 자유로운 활동을 방해하는 요소들을 제거하는 것이 정부가 해야 할 일이라고 강조했다. 그것은 옳은 방향이다. 그러나 그 연장선에서 시행된 법인세 인하는 주로 경제적 강자에게만 혜택이 돌아갔고 국민 다수의 삶은 제자리이거나 더 나빠지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

존 스튜어트 밀이 『자유론(On Liberty)』에서 밝혔듯이 자유란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사는 사회성을 유지하면서 각자가 자기 발전을 추구하고 자기 나름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경제정책의 측면에서 보면 자유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경제적 강자와 약자 사이에 ‘힘의 불균형’을 줄여야 한다. 특히 정부는 경제적 강자가 약자의 자유를 존중함으로써 각자 원하는 경제활동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 대기업의 기술 탈취나 납품가 후려지기 등 각종 불공정 행위는 하청기업이 정당하게 누려야 할 이익을 빼앗아 하청기업 임직원들의 경제적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한다.

경제적 강자와 약자 간 ‘힘의 균형’을 도모하는 방식에는 입법을 통한 사전적 방식과 공정한 이익 배분과 같은 사후적 방식이 있다. 현재 야당이 절대다수를 장악하고 있는 국회에서 입법을 통한 사전적 방식은 현실성이 없다. 따라서 국회를 장악하지 못한 윤 대통령은, 민생의 구체적 사안에서 발견되는 불균형과 불공정을 바로 시정해야 한다. 이것은 품이 많이 드는 작업이지만, 윤 대통령은 이 길을 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더욱 거센 반발에 직면할지도 모른다.

또한 대통령은 국정의 창의적 운영을 위해서 대대적인 인적 쇄신을 단행해야 한다. 지금까지 윤석열 정부의 대통령실과 내각 구성은 너무 편향적이었다는 게 세간의 평가다. 학력으로는 서울대가 너무 많고 경력으로는 검찰을 비롯한 공무원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지역적으로는 서울·영남 일색이고 나이와 성별로는 60대 남성이 대부분이다. 지금 한국경제가 살려면 창의로운 인재를 적재적소에 잘 활용해야 한다. 그러려면 국정운영에도 다양성을 추구해야 한다. 다양성은, 창의성의 충분조건이 아닐지 모르지만, 적어도 창의성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윤 정부 국정운영의 난맥상은 의정갈등에서도 나타났다. 그 결말이 어떻게 될지는 두고 봐야 하지만, 대학의 입학 정원을 정부가 정하는 것은 대학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것이다. 대학은 어느 기준으로 학생을 몇 명 뽑아서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정부는 창의적 국정운영의 시작으로 의대 정원 문제를 자유주의적 원점으로 돌려 다시 생각하는 것이 옳다.

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전 서울대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