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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면허로 회사차 몰다 사망했는데…法 '업무상재해' 인정 이유

중앙일보

입력

한 공사현장 모습. 사진은 본 기사 내용과 관련 없음.

한 공사현장 모습. 사진은 본 기사 내용과 관련 없음.

“비가 많이 오진 않아서 오늘 작업은 정상 진행하겠습니다.”

지난 2021년 어느 날, 공사 과정에서 나온 흙을 다른 현장으로 옮기는 일을 해 오던 현장 부장 A씨는 담당자와 통화를 하며 운전하고 있었다. 새벽 시간 가로등 하나 없는 미개통 도로 주변은 아직 깜깜했다. 비는 그날 일을 못 할 만큼 내리진 않았지만 노면을 매우 미끄럽게 할 정도로는 내렸다.

사고가 벌어진 건 순식간이었다. 직진 중이던 A씨는 앞에 철제 난간이 나타난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길은 이제 오른쪽으로 돌고 전방엔 길이 없는데 그대로 직진했다. A씨는 난간을 들이받고 배수지로 추락했다. 오늘도 일하겠단 말이 A씨의 생전 마지막 통화가 됐다.

이듬해 유족들은 유족급여를 청구했으나 거절당했다. 사실 A씨는 당시 면허취소 상태였다. 근로복지공단은 유족들에게 ‘근로자의 범죄행위가 원인이 돼 발생한 사망은 업무상 재해로 보지 않는다’는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조항을 짚어줬다. A씨가 도로교통법 위반을 저질러 숨진 것이니 보상하지 않는단 것이다.

서울 서초구 서울행정법원. 연합뉴스

서울 서초구 서울행정법원. 연합뉴스

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서울행정법원 13부(부장 박정대)는 지난달 7일 업무상 재해를 인정, 유족들에게 급여를 주라고 판결했다. 숨진 A씨가 면허 없이 운전하거나 앞을 제대로 보지 않은 게 잘못이 아니란 얘기가 아니다. 종합해 봐도 이 사고는 결국 “어두운 새벽 시간 한 공사현장에서 다른 공사현장으로 이동하는 업무 자체에 내재한 전형적 위험이 현실화한 것”이란 게 재판부의 평가다.

재판부는 산재보험은 근로자와 가족의 생존권을 보장하기 위한 것인데 그걸 받지 못할 만한 범죄행위란 “고의·자해행위에 준하는 행위로서 재해의 직접 원인이 되는 행위”로 한정해 봐야 한다고 했다. 대법원은 근로자의 중대한 과실이 있는 경우라도 ‘업무수행을 위한 운전과정에서 통상 수반되는 위험 범위 내’에서 벌어진 사고라면 업무상 재해로 본다(2022년 5월). A씨 사고도 ‘업무상 수반된 위험 범위 내’에서 벌어진 것인지 따져봐야 했다.

재판부는 우선 A씨가 운전면허 보유 여부와 별도로 차를 운전할 사실상 능력이 있었는지를 따졌다. 운전할 줄 모르는데 운전을 한 거라면 그것을 사고의 직접 원인으로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재판부는 “A씨는 1991년 운전면허 발급받은 이후 상당 기간 운전을 해왔고 해당 회사 차량을 운전할 사실상 능력은 있었다”며 “무면허 운전 행위가 사고 발생의 직접 원인은 아니다”고 봤다.

PE 방호벽. 사진은 지난해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이 우기 대비 현장점검을 하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PE 방호벽. 사진은 지난해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이 우기 대비 현장점검을 하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재판부는 “A씨의 전방주시의무의 태만이 사고 발생의 하나의 원인이 되었을 것”이라 보긴 했지만, “당시 배수지 앞 커브 길에 PE방호벽이 일부 있긴 했으나 조명 등 안전시설물은 없었던 점 등에 비춰보면 이 사고가 온전히 A씨의 과실로 발생한 것인지 의문”이라 했다. 결국 “이런 사고는 아직 어두운 새벽 시간 한 현장에서 다른 현장으로 이동하는 근로자에게 있어 주의를 조금만 게을리해도 도로 여건이나 교통상황 등과 결합해 언제든 벌어질 수 있다”고 봤다.

근로복지공단은 유족들의 손을 들어준 이번 선고에 항소하지 않았고, 1심인 이 판결이 지난달 30일 확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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